빌립보서

빌립보서1장 강해(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인사와 감사, 기도)

호걸영웅 2022. 4. 29. 23:26

빌립보서1장 강해(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인사와 감사, 기도)

 

서론)

1장 본문 내용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인사와 감사, 그리고 그들에 대한 기도와 자기의 형편에 대한 의미와 성도의 합당한 삶에 대한 서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론)

)인사말(1,2)

*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이 편지는 바울사도가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과 감독 및 집사들에게 보낸 것으로,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통상적인 편지의 양식에 따라 발신자 자신을 소개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좀 더 집중해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의 신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이란 ‘자유자’와 반대용어로 주인의 일을 하고 있는 전적인 부자유자, 즉 노예(Slave)를 말합니다. 당시 노예는 주인이 죽이고 싶으면 죽여도 되는 일고의 생명보존의 가치가 없는 마치 재산과 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종이라 표현한 것은, 바울 자신이 얼마나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한 일꾼임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종인가? 아니면 자유자인가? 자신의 사명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감사(1:3-6)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와 교인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게 되고, 그들을 위한 중보기도가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사도행전 16(16:6-40)에서 잘 나타나는 것처럼 빌립보교회가 바울의 유럽전도 여행에서 처음으로 세운 교회일 뿐만 아니라, 바울사도의 필요를 항상 채워주는 아름 다운 복음사역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빌립보교회에는 자주장자 루디아가 있었고 그의 집에서 최초로 교회가 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에바브로디도는 물론 빌립보 감옥에 감금되었을 때 하나 님의 은혜로 쇠사슬이 풀려 도망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가지 않음으로 인하여 간수의 가족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는 등 믿는 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성장했습니다. 빌립보서 제4장에 보면 에바브로디도는 물론 유오디아와 순두게, 글레멘드와 그 외 바울사도의 동역자들(4:2-3)에 의하여 빌립보교회가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 복음에 대하여 동참한 성도들에 대한  감사(1:7-8)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바울 사도가 빌립보교회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게 된 이유 3가지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앞 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빌립보교회의 복음을 위한 착한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복음에 대한 헌신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함께 했다”고 한 것입니다. 특히 옥중생활을 염려하여 빌립보교회의 교인인 에바브로디도까지 파송하였던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렇게 바울사도를 수종 들기 위하여 보낸 에바브로디도가 그만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그들로서는 바울사도에게 누를 끼치는 것 같아 염려까지 하고 있을 정도니다(2:27). 얼마나 바울사도에게 감사한 일인가요? 이처럼 빌립보 교회와 같이 우리의 봉사와 헌신이 우리의 감정에 의한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실 때까지 영원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둘째, 빌립보 교회는 바울사도의 “마음에 늘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처럼 몸은 서로 떨어져 있으나 마음 은 한가지인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말하는데, 바로 바울과 빌립보 교회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빌립보 교회를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 다. 다만 세상적인 사랑으로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心腸”으로 사모하고 있는 것입 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장이란 달리 말하면 ‘愛情’(affection)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애정은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바로 그의 ‘十字架’ 지심이 아니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이러한 마음으로 그들을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연애를 해본 분은 잘 알 것입니다. 너무나 청춘남녀가 서로 사랑하다보면 잠시도 떨어져 있는 것이 마치 하루가 천년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방 만나고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사이에 그리워 전화를 하듯, 이 모습이 바로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셋째, 빌립보 교회의 헌신과 수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한 것이요, 또 참된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했다는 점에서 바울사도 역시 감사가 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날”이라고 할 때는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날”은 재림주로 오실 그날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시대에 성도들도 지하묘지인 카타콤(Catacomb)에 숨어서 신앙의 정절을 지켰으며, 그들 은 성도들끼리 "주님 다시 오십니다“(Maranata)라고 늘 말했습니다. 곧 재림을 사모할 만큼 얘수를 사랑하였습니다.

 

)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1:9-11)

1) 사랑을 위한 중보기도(1:9-10)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이제 바울사도는 감사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또한 빌립보교회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일까요?

첫째, 빌립보교회의 사랑이 한낮 일순간의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왜 이와 같은 사랑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분명한 지식, 즉 ‘지식과 총명’을 더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사랑은 다소 감정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거저 감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상대방을 더욱 잘 알아감으로써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높이를 확대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레를 들면……바울 사도는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3:16-19)고 했습니다.

 

둘째, 빌립보교회에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도록” 간구합니다. 빌립보교회는 좀 이단사설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당시 소아시아지방의 교회나 고린도교회에서는 너무나 많은 이단사설에 의한 노출이 됨으로, 복음이 너무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예로 “영지주의”(靈知主義)나 또는 율법주의(律法主義)가 가장 대표적이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순수성과 진리에 바로 서서 교회가 보호되기 위해서는 지극히 선한 복음과 이단사설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교회가 든든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 고난 중에 있는 바울의 성도들을 향한 고백과 권면(1:12-30)

1) 고난은 복음을 증진시킨다(1:12-18)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중국 속담에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지요? 옛날 중국 북방 국경 근처에 점을 잘 치는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기르는 말이 갑자기 도망쳐 오랑캐들이 사는 국경 너머로 가버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위로하자 노인은 "이 일이 무슨 복이 될는지는 알 수 없소."라며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몇 달 후 도망갔던 말이 오랑캐 땅에서 좋은 말을 한 필 데리고 돌아오자 마을 사람들이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이 일이 무슨 화가 될는지 알 수 없소 ."하고 기뻐하 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 타기를 좋아하던 노인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인은 "이 일이 혹시 복이 될는지 누가 알겠소." 했습니다. 그 뒤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젊은이들이 모두 전쟁터에 나가 전사했는데 노인의 아들은 다리가 불편해 서 전쟁에 나갈 수 없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은 지금 상황은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나쁜 결과가 생길 것처럼 여겨지지만, 지나고 보면 그것이 때로는 나쁜 결과가 아닌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처럼,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바울사도는 분명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의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보면 사탄 마귀나 바울 사도의 복음전파를 방해하던 자들은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의 매임은 복음을 전하는 데 방해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된 것입니다. 황제의 시위대 감옥에 감금된 바울사도는 이곳에서 감방을 지키는 군인들을 만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귀족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그래서 바울사도는 가이사의 집 사람 몇 명도 너희들에게 문안한다(4:22)고 한 것입니다.

 또 바울 사도는=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하십니다.

15-18= 바울사도가 로마 감옥에 갇혔으나 어떤 방법으로든 복음이 전하여졌기에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초창기 한국에서도 복음을 전파하던 외국의 선교사들은 서로 경쟁을 막기 위하여 지역을 나누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2) 바울의 고난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이 되었다(1:19-26)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함이라=  바울 사도의 삶의 목표는 복음전도의 사명자로서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 니다. 즉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구원’이란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감금되었지 만, 석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의 육적인 구원과 또 다른 하나는, 근본적인 천국시민으로서의 성도의 영적인 확실한 구원입니다. 정리하면 바울사도는 육적으로는 감옥에서 나오게 되는 경우 더욱 복음전파를 할 수 있다는 면에서 기대를 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감옥에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천국에 이르는 경우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 이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궁극적으로 어떠한 상황에 처하건,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고백하며 순교를 두려워 않았습니다.

 

)고난에 대한 엄숙한 교훈들(1:27-30)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1:27-30 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이러한 일이 결코 실패와 좌절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더욱 존귀케 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면 이제 바울사도 그 자신이 이와 같이 복음을 위하여 살고 있는 것처럼, 빌립보교회의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일까요?

1)첫째, 천국시민은 모두 천국시민권을 가진 한 지체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둘로 나뉘어서는 안 되며, 모두 일심으로 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빌립보서에서 보면 이러한 복음의 훼방꾼 중에 유대주의의

율법주의자들, 곧 손할례자들(3:2-3)이 그들입니다.

2)둘째,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리에 서서 복음을 전하며 지키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적대자들은 멸망의 증거가 기다리고 있는 반면에 자신과 함께 고난을 받음에도 굳건히 서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구원의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

고로 그리스도인이 되면 만사형통(萬事亨通)의 길로 가는 신분증을 확보한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 했습니다. 자주 우리가 접하는 것이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물질의 복, 건강의 복을 무조건 누리게 된다는 기복주의(祈福主義) 내지는 번영주의(繁榮主義)입니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왜 바울사도는 “나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했을까요? 예수 믿으면 세상이 말하는 만사형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며, 나의 모든 삶의 주관자가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그 분에 대하여 전적인 신뢰와 의지로 나아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때로는 나에게 여러 모양의 고난이 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041222 안익선 목사/ 참조:Lawhel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