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빌립보서 3장 강해 (사명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가라)

호걸영웅 2022. 4. 29. 23:28

빌립보서 3장 강해 (사명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가라)

 

서론)

3장은 사도 바울이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바울의 그들에 대한 당부와 신앙적 소명을 이루어 함께 나아가자는 권면과 그 당찬 결의를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본문 구성=1)육체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영의 일들(1~3),   2) 4-9.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바울의 간증, 3) 10-16.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아 부활에 참여하라, 4) 17-21. 하늘의 시민권자 답게 살라-등 입니다.

본론)
)육체의 힘으로는 절대 영()의 일을 할 수 없다[ 3:1-3.]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우들에게 다시 한번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1). 기쁨(喜樂)은 그리스도인 에게 기본 행동 강령입니다(살전 5:16-18). 사도 바울은 자신이 기뻐하는 모습을( 1) 보이면서 기뻐하는 믿음의 방식을 소개했습니다. 바울이 감금된 상태와 시기, 질투를 받는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모범으로 빌립보 교우들에 게도 담대하게 기뻐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부분적으로 한마음을 이루지 못하면서 갈등이 발생해서 기쁨이 사라졌었는데, 바울은 그 기쁨이 사라지지 않게 하도록 권면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기쁨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육체의 생각, 방법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환란 중에도 기뻐할 수 있고, 기쁨이 있는 상태는 안전한 상태입니다(1).

성도들이 기쁨의 삶을 살도록 권면하는 것이 지나치지 않고 오히려 기쁨이 증진되도록 해야 합니다. 기쁨이 크면 클수록 안전한 상태일 것입니다. 성경의 특이점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뻐하라고 명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기뻐하라는 권면을 받으면 더 화가 나거나 조롱을 받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권위자 바울이 기뻐하라고 명령할 때, 겸손하게 순종해서 기쁨에 이를 수 있는 경건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2)의 개들, 행악하는 자들, 몸을 상해하는 자들은 모두 같은 부루의 사람들에게 대한 표현이며 그들은 이단 교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 13:24-25).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속지 않도록 강력하게 경계하도록 권면했죠. 그리고 사도는 빌립보 교우들이 분별력을 갖도록 언제나 주께 기도했습니다( 1:10). 그러면 거짓 가르침을 교회에 허용하신 이유는 무엇일 까요?(참고;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 여호와) 거짓 가르침은 진리를 더욱 빛나게 하는 역설적인 기능이 있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이 땅에 존재하는 죄악(罪惡)은 쉽게 다룰 수는 없습니다. 고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도록 지도했습니다(3).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며, 그 믿음으로 겸손히 교우들을 섬기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죠. 육체를 신뢰하면 자기를 자랑하며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예수를 자랑할 수 없다 했죠. 우리는 예수를 자랑한다고 하면서 자기를 자랑하는 교묘한 꼼수를 사용하는 악습이 있습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도와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할례당이라 했습니다. 이 할례당은 마음의 할례를 받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들입니다( 10:16, 30:6, 4:4, 2:11-15).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았고, 자기 육체의 모습을 배설물(3:8)로 선언했습니다. 육체를 신뢰하며 얻는 기쁨은 얼마나 교묘하고 놀라운지요? 그러나 이런 기쁨은 성령으로 기뻐하는 즐거움과 전혀 다른 성격을 갖습니다.

거짓 교사는 육체의 자랑을 감추기 위해서 경건의 모양을 악용합니다. 그리고 경건한 자를 비웃은 태도를 갖습니다. 거짓 경건의 이름으로 참된 경건한 자를 압박합니다. 그리고 돈과 명예와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유지하는 것을 전념합니다. 하늘의 보화로는 기뻐할 수 없고 오직 땅의 돈, 명예, 권세를 소유한 것을 목표와 기쁨으로 생각하죠. 거짓 교사는 탐욕의 성취를 즐거워하며 겉으로 종교적 모양으로 포장합니다. 실례;(푸틴을 지지하는 러시아 정교회, 히틀러를 지지하던 독일 교회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바울의 실천[ 3:4-9.]
교회에 잠입해서 교회를 훼방하는 유대주의 무리에 대항해서, 바울은 부득이하게 자기 육체를 제시했습니다. 비록 바울이 자기 육체의 이력을 제시하지만 오직 그리스도가 교회에서 높여지고 영광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바울의 육체(이력서)는 당시 유대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죠(4).

바울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유대인이며, 이스라엘 족속 중에서 베냐민 지파로 사울왕의 왕족 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와 함께 언약을 유지한 지파이죠. 그리고 히브리어를 사용할 수 있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죠. 로마시민권자요 당시 최고 교육자인 가말리엘 밑에서 공부한 대학자 였습니다. 만일 육체를 자랑하는 유대인들 중에서 바울(사울)만큼 인간적 면에서 자랑할만한 유대인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사울은 교회를 박해하는데 가장 앞장선 위인 혹은 영웅이었습니다 (7). 그것은 유대 사회가 다 인정할 만큼 유명했던 사실이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을 처결하는데 주도했습니다( 7). 그런 사울이 그리스도인,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감당했음을 선언합니다(4-6).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모든 것을 해()롭게, 그리고 하찮게 여겼습니다(8). 이전 유대교에 대한 율법주의적 지식을 버리고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을 추구했습니다(8). 전자는 배설물과 같고 후자는 가장 고상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자신은 유대교에게는 원수가 되었지만 그러나 그 대신에 부활과 영생의 그리스도 예수를 얻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이전에 유익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겨 버렸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얻기 위한 행동이었습 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의()를 가졌다고 선언하며, 그 의의 근원을 율법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받은 것으로 고백했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난 것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의도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죠(9). ‘의’(δικαιοσνη)는 히브리어 두 단어(미쉬파트와 체타카)에서 헬라어 한 단어로 옮겨(번역)졌는데, 영어에서 다시 right just로 번역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공의’와 ‘정의’로 구분하던 것을 ‘의’로 묶어서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아 부활에 참여하자[ 3:10-16.]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표어로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도 바울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다”고 고백했습니다(10).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어떤 신비한 종교 형태가 아닌, 고난에 참여함, 자기부정(십자가를 짊)에서 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 부활의 권능을 아는 것으로, 곧 부활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지식이라고 제시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성품을 본받는 다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본받는 것이라 했죠. 2장에서는 성육신의 신비를, 3장에서는 십자가의 신비를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역의 마지막 여정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태가 구원을 이미 얻었다고 확신하는 것도 아니고 온전히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고 있는 상태로 제시했습니다(12). 2:12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권면과 같은 맥락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 사건 이후로 자기가 성취한 모든 것을 다 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자신이 잡아야 할 목표가 남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생명이 끊어지기까지 목표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뒤의 일을 잊어버릴 수가 있죠.  앞의 목표가 사라지면 당연히 뒤의 일이 생각납니다. 앞의 목표가 사라졌다는 것은 죽음만 보인다는 것이죠. 그러나 성령에 붙잡힌 그리스도인에게 과거의 업적이 사라지고 미래의 목표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죽음은 그리스도인에게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천국으로 가는 통로에 불과합니다.  

고로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서 달려간다고 고백했습니다(14). ‘달려간다(press, δικω)’는 12절과 14절에서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거침없이 믿음의 정진을 계속한다고 외치고 있다. 믿음의 정진은 어떤 것도 가둘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죠.

“부름의 상()”은 상급으로 바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온전히 이루었다는 생각을 경계하도록 권면했습니다(14). ‘다 이루었다’는 선언은 주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지고 가면 ‘다 이루었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없다는 것이죠. 십자가를 지면 하나님께서 달려갈 길이 밝히 보입니다. 십자가를 진 백성은 하나님께서 보여준 그 길을 그대로 행하면 될 뿐 입니다(16).

)하늘의 시민권자답게 살라[ 3:17-21.]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17). 빌립보 교우들이 사도를 본받으 면, 바른 복음 사역자와 성도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7). 참 교사나 거짓 교사나 모두가 예수를 전하기 때문에 깨어있지 않으면, 육의 본성에 부합되는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미혹될 수 밖에 없습니다. 거짓 교사는 예수 이름으로 십자가의 원수가 되도록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다시 한번 거짓 교사, 십자가의 원수의 행동에 대해서 경계하며 권면합니다(18). 사도의 심정은 눈물을 흘리며 간절한 마음으로 빌립보 교우들을 권면케 합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에 유혹되지 않는 가장 유력한 방법으로 참 교사의 권위를 존경하고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거짓 교사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들이요, 그들은 멸망 당할 자들이며, 먹는 것을 위해서 즉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사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그들의 영광은 땅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땅에서 멸망될, 땅에서만 필요한 배, 이 땅에서만 유효한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무리 예수의 이름을 말해도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이니 따르지 말라 했죠. 그 거짓 교훈을 즐거워하는 것은 곧 중독(中毒)되어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사도는 독특하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20).  하늘에 있는 시민권을 받은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20). 세상을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고 견딜 수도 없기에, 주의 힘으로 견디며 주의 오심으로 세상을 이길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 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입으로 ‘마라나타’를 읊조리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날이 오면 주께서 만물을 실제적으로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것입니다(21). 그리고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21). 빌립보서 2장에서는 예수께서 종의 형체를 가져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광의 형체를 우리에게 보여주셔 소망을 갖게 하셨다 했습니다.

비록 흙으로 창조된 인간일지라도 창조주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은 예수 안에서 영광의 형체로 변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아들 하나님, 구속의 은혜,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승천, 성령 파송, 재림 등을 통해 영광의 형체로 우리를 변형시키실 것을 굳게 믿으며 살아야만 합니다.

결론)
하나님은 교회를 주 예수의 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이 뿌린 거짓이 아직도 힘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 안에서 우리의 기쁨을 사라지게 하는 거짓 가르침을 경계해야 합니다.  또 육의 즐거움을 탐닉하지 않도록 경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푯대를 앞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진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의 마지막 날에 영광의 형체로 변화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하늘에 있는 시민권을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주의 재림의 날에 영광의 몸의 형체를 입게 되도록 주를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042622 안익선 목사/ 참조:고경태 & 본헤럴드(http://www.bonhd.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