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잠언 1장 강해설교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

호걸영웅 2022. 4. 29. 23:34

잠언 1장 강해설교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

 

서론)

잠언 1장부터 9장까지는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했습니다. 본문 1 1=“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했고,  곧 이어 잠언을 쓴 목적을 2절에서 4절에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라 했어요.

 

본론)

)지식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이러한 목적들은 성경 전체의 목적이기도 하기에 디모데후서 3 15절에서 17절과 유사하기도 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먼저 지혜를 알고 그런 후에 훈계를 받아야 합니다. ‘훈계’는 히브리어로 ‘rs;Wm(무사르)인데, 곧 훈련을 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훈련은 교육을 통해 숙달되게 행동토록 합니다. 무엇이든 숙달되어야 문제를 최소화하고 능숙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군인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훈련을 받아야 하고 의사가 사람을 살리려면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훈련 없이는 사람을 살릴 수가 없고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동안 고된 훈련을 시키고 또한 그 훈련을 달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도 이렇게 지혜를 알고 훈련을 받아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 여호와를 잘 경외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훈련을 잘 받으면, 여호와를 경외함에 능숙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에 능숙한 사람이 되는데 능하게 됩니다.

 

고로 그 결과에 대해 5절과 6=말합니다.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했습니다. 아울러 솔로몬 왕은 세계 최고의 지혜로운 사람답게, 세상 모든 지혜 중의 지혜가 무엇인지 말합니다.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근본’은 히브리어로 레쉬트 인데 “첫째, 최초, 처음, 시작, 기초, 본질”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시작을 잘해야 합니다. 단추를 처음부터 잘 꿰어야 마지막까지 잘 꿰어집니다. 처음에 잘못 꿰면 다 꿰고 나서 어긋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단추를 잘 꿰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잘 믿어야 마지막에 가보면 천국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잘못된 가짜

예수(이단 교주)를 믿으면 천국에 갈 줄 알고 열심히 단추를 꿰었지만 끝까지 꿰어보면 마지막에 어긋나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옥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고 땅을 치면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단추를 잘 꿰어야 합니다. 성경대로 오시고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제대로 경외하는 사람 은 시작을 잘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멸시하는 사람, 예수의 십자가 공로와 구원을 부인하는 사람은 시작부터 잘못 출발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인생 회고적 체험담

솔로몬이 말년에 쓴 전도서를 통해 보면, 솔로몬 왕은 한 때 방탕한 생활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은 자신의 마음에 말하였습니다. “자, 내가 시험 삼아 나를 즐겁게 해 보자.”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업도 크게 하고 집들도 짓고 포도원도 일구었습니다. 여러 동산과 과원도 만들고 거기에 각종 과목을 심었습니다.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해 못도 팠습니다. 남녀 노비도 많이 사고, 소와 양떼도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졌습니다. 은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쌓기도 하였습니다. 솔로몬 왕이 먹고 마시는 그릇과 궁궐의 모든 것이 정금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의 재산이 천하 열 왕보다 컸고 노래하는 남녀들과 처와 첩도 많이 두었는데 후궁이 칠백 명이고 첩이 삼백 명이었습니다. 이렇게 솔로몬 왕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금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마음에 즐거워하 는 것은 다 즐겨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즐거움과 쾌락이 솔로몬 왕을 더 이상 기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모든 쾌락과 수고는 헛된 것임을 알게 되어 “이 모든 것이 바람 잡는 것이 되었구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솔로몬 왕은 값진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 다”(3:14). 그리고 다시 한번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12:8)라고 하면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12:13,14)고 힘써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솔로몬 왕을 알고 나면, 잠언을 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지식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더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1 7절 말씀을 되새겨 보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이 똑똑한 사람이다 라는 거죠. 세상 모든 것을 잘 알아도 이것을 모르면 알 것을 모르니 참 무식한 것입니다.

 

이렇게 솔로몬 왕은 잠언의 주제를 말씀하신 후에 드디어 사랑하는 자기 아들에게 말였습니다. 8절과 9=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영광이 주어집니다.


올림픽에서 우승하는 선수는 머리에 월계관을 쓰게 되고 목에 금메달을 메게 됩니다. 코치와 감독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도 이와 같은 영광을 받게 됩니다. 아름다운 관, 즉 아름다운 “화환”을 쓰게 되고, 목엔 금 사슬, 즉 황금 “목걸이”를 걸게 됩니다.

솔로몬 왕은 간곡하게 “내 아들아”라고 그 백성들에게 수차례 부르며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사망과 생명에 대한 대조

솔로몬은 이렇게 서론부를 시작하여 그 다음엔 악한 자와 지혜의 서로 다른 초청을 대조시켜 사망과 생명을 대조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지식의 근본이신 여호와를 경외하라 했습니다.

 

 10절입니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합니다.

이어 11절에서 14=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스올 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 같이 통으로 삼키자.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을 채우리니.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라고 유혹하는 무리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이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가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15절과 16절입니다.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이들은 결국 살인강도라는 겁니다.  

 

17절에서 19절입니다. “새가 보는 데서 그물을 치면 헛일이겠거늘, 그들이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오늘날도 이런 자들이 곳곳에서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며 재물과 생명을 빼앗아 갑니다. 신종 도둑도 많이 생겼습니다. 보이스피싱, 사기, 강도, 절도, 테러 등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들은 지혜롭지 못한 자들입니다. 칼로 흥하면 칼로 망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진짜 강도는 마귀 사단입니다. 그는 무수한 생명을 빼앗아 가고( 10:10) 말씀을 빼앗아 갑니다( 13:19). 성도들을 미혹하여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2:4, 딤후 3:6, 벧후 2:1, 1:4). 이 모든 것은 결국 자멸로 인도하는 길이 됩니다.

 

사단과 그 무리의 결국을 요한계시록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19 20절입니다.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라 했습니다.

20 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했어요.


21 8절도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했습니다. 결국 속여서 남의 것을 빼앗고 죽이는 자들의 최후가 어떨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0절과 21절입니다. 여기서부터  솔로몬은 지혜를 의인화하여 말씀합니다. 지혜가 초청하는 모습으로 우릴 부른다 했습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라고 합니다.

 

22절과 23절입니다.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합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아니합니다. 지혜가 이렇게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거들떠보 지도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멸시하였습니다. 24절과 25절입니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그래서 지혜는 매우 실망하여 말하였습니다. 26절과 27절입니다.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지혜)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라고 경고합니다.

 

지혜는 부를 때에 응답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무서운 징계와 재앙을 만난 후에야 뒤늦게 도와달라 부르짖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매정하게 말합니다.

28절에서 31절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합니다.

모든 일엔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들에겐 이미 때가 늦을 것을 말씀해줍니다. 뒤늦게 후회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축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 축복을 놓치고 나서 후회하였지만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지혜는 다시 말하였습니다. 32절과 33절입니다.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했습니다.

 

결론)

요즘 우리는 불안정하고 악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요즈음 안전한 삶을 많이들 외칩니다. 진정한 안전은 어디로부터 옵니까? 지혜로운 삶으로부터 안전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지혜의 길은 어디에 잇습니까? 곧 살아 계신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042922 안익선 목사/ 참조: 이서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