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선교적인 삶을 살자(딤후4:1-5)

호걸영웅 2022. 10. 4. 09:54

선교적인 삶을 살자(딤후4:1-5)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서론)

20세기 독일의 세계적인 석학이자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에밀 브루너(E. Brunner,1889~ 1966)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불은 타오르기 위해서 존재하듯이 교회는 선교를 위해서 존재한다.”라고 했습니다.

 

10월은 선교의 달입니다. 선교란 쉽게 말하면 해외에 가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입니 다. 정확한 통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에선 선교에 관심을 가진 성도들 중에서 실제 로 해외에 선교사로 헌신하는 것은 불과 1%도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국내에 남아있는 99%의 성도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린다면, “선교 적인 삶(Missional Life)”을 살아야 한다 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역들이 있지만, 결국 모든 사역의 최종 종착점은 에밀 브루너의 말처럼 선교 및 전도, 즉 영혼구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적인 삶”을 사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 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적인 삶은 단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삶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뭐뭐~답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교회답다’, ‘성도 답다’ 등과 같은 표현들입니다. 그러면 어떤 교회가 교회답고, 어떤 성도가 성도다운 것일까요? 결국 선교적인 삶을 추구하는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이고, 선교적인 삶을 사는 성도가 바로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다운 삶의 방향이 아닐까요?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선교적인 삶을 사는 것일까요? 함께 이런 부분에 대하여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선교를 위해 관심과 기도와 투자를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선교적인 삶이란, 어쩌다가가 아니라, 늘 선교에 관심을 갖고, 보내는 선교사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입 니다. ‘사랑은 관심’이고,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 ’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들이 선교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선교에 진정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보내는 선교사 (Sending Missionary)라 는 말은 파송된 선교사를 위해 배후에 중보기도하고, 격려하고, 후원하는 성도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해외 선교사로 직접 나가지 못한다고 해서 선교적인 삶까지 포기해 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참된 관심과 함께 중요한 것이 “타이밍” 즉 시간입니다. 영혼구원 사역은 “지금 해야 할 사역입니다. 예전에 “나중에 돈 좀 벌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좀 한가해지면 하겠습니 다”라는 식으로 말을 하는 분들이 가끔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이 ……선교도 마찬가지 로, 지금 못하는 사람은 나중에도 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가 큰 것에도 충성하는 법입니다(16:10=“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 니라”고 했습니다. 1달러 후원이나 단 1분의 기도라도 지금부터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인 디모데후서 4 2절에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고 했습니다. 항상 힘써야 합니다. 나중에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선교에 관심을 갖고, 선교사들이 보낸 편지를 자세히 읽고 위해 기도하며, 지금 우리 앞에 주어진 우리 일생의 단 한 번 밖에 없는 귀한 시간들과 정력과 물질들을 예수님을 위해 항상 투자하는 마음으로 사용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나의 것들을 꾸어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것으로 여러분께 분명히 갚아 주십니다. 이것이 선교적인 삶을 사는 첫번째 방법입니다.

 

) 선교적인 삶이란 가까운 사람부터 전도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선교적인 삶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부터 전도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이웃의 영혼을 구원시키려고 애쓰는 사람이 멀리 있는 타국의 영혼에게도 선교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해외로 보내심을 받지 않더라도 이미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복음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서 지금 내 옆에 이사 온 가까운 사람들 부터 전도를 시작해 보시길 바랍니다. 최근에 알게 되고 만나 사람부터 전도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선교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엘에이(L.A) 지역에서 목회를 시작하신 캐빈 하란 목사님은 사역하고 기도하던 중, 노숙 자 전도의 사명을 받게 되었는데, 그 도시 동네들(Downtown)에 모든 노숙자들과 주변의 점포들을 찾아 다니며 자기의 비전을 설명하면서 노숙자들을 돌보았다고 합니다. 당시 엘에이 지역에 약 5만명 의 노숙자가 있었는데, 사역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도 종종 있었지만, 그러나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집을 날마다 오픈하였고 극장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는데,  지금 수천명의 각 나라의 다인종 다민족의 성도들과 빈부가 다른 성도들이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며 노숙자와 고아들을 섬기는 삶을 나누고있다고 합니다. 이런 큰 전도 사역에는 많은 희생이 필요하고 용기와 결단, 그리고 헌신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도 작으면 작은 규모대로 아무것도 희생하지 아니하고 선교나 전도를 할 수는 없습니다. 보다 헌신적이고 창의적이며 사랑이 우러나오는 전도에 힘을 쏟고 기도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선교적인 삶이란, 하나님 사랑으로 동참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들이 주님의 영혼구원사역과 선교사역에 참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동기입 니다.  사랑하면 전도하고, 사랑하면 선교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는가 하면,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예수 곧 우리 주께서 사랑하는 그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예수의 사랑으로 선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게 만듭니다. 사랑은 우리들이 행동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듭니다. 감출 수 없다는 점이 바로 사랑의 특징입니다. 요한복음 3 16절을 보면,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를 보내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니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거죠.

 

부활의 주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게 하시면서 다른 어떤 것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 냐 ”라고 물으신 것도 이런 맥락일 줄 믿습니다(21).

 

만약 내 안에 이러한 사랑하는 마음이 별로 안 생긴다면, 아직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모르시 거나 불감증에 걸린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촛점이 아직도 빗나가 있거나 흐리거나 엉뚱한데 있다는 것입니다. 촛점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셔야 합니다.

 

모든 교회들은 사랑의 동기로 해외의 선교사님들을 돕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주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찌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잘 모르는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선교비 를 보내고, 기도로 후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앞으로도 예수님이 주신 이러한 사랑의 마음 을 더욱 확장 시켜, 전도와 세계 선교에 더욱 힘을 쓰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화) 기독교 역사에는 이러한 하나님과 양들을 사랑하는 동기로 선교에 힘썼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 습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에릭 리델(Eric H. Liddell, 1902~1945) 선교사입니다. 에릭 리델은 스코틀랜드의 육상 선수이자, 중국에서 선교했던 장로교 선교사였습니다. 그의 일대기 는 “불의 전차(1981)”라는 영화로도 제작 되었습니다. 에릭 리델은 중국 톈진에서 선교사인 부모님에게 태어났고,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에릭 리델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400m 경주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면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는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부터 자신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린다고 자주 고백했었어요. 에릭은 원래 100미터가 주종목이었지만, 100미터 경기가 주일에 열린다는 이유로 시합을 포기하였습니다. 그 대신 200미터와 400미터에 출전했는데, 출발신호가 울리자 마자 그는 마치 100미터를 달리듯이 경주장을 달렸습니다.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얼마 뛰지 못하고 에릭이 쓰러질 것이라고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400미터 전구간을 불의 전차처럼 초인간적인 힘으로 달리면서 세계신기록을 세웠 다고 합니다.

 경기 후에 기자들이 어떻게 그런 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느냐고 질문할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100미터는 내 힘으로 뛰었고 나머지 300미터는 하나님이 뛰어 주셨습니 다!”라고요.

 그리고 이듬해 과학과 신학 학위를 취득한 후, 다시 중국 텐진으로 건너가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대동아전쟁이 일어났고 일본군들에게 중국군의 간첩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고 수용소에 억류되었습니다. 에릭 리델은 수용소 안에서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42세에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확신컨대 그는 천국에서 올림픽 금메달보다 더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생명의 면류관을 받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럼 에릭 리델은 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서 누릴 수 있었던 명예와 부()를 포기하고, 다시 중국 선교사로 떠났을까요?

 

그것은 마치 쿼바디스”라는 영화에서 사도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로마로 가서 순교 당했던 것처럼, 에릭 리델 역시,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부모가 목숨을 던져 사역하셨던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특별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이것이 그가 일생동안 선교적인 삶을 추구했던 동기였고, 운동장에서 달리고 중국으로 건너갔던 이유였습니다. 에릭 리델의 이러한 열정적인 삶의 모습이 지금 우리들이 추구해야할 선교적인 삶의 모습이 아닌가 라고 저는 확신해 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옥의 불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오신 인류 최대의 선교사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예수께 사랑의 빚을 졌으며, 뿐만 아니라 한국이나 해외에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님들과 나를 교회로 인도해 준 여러분들에게도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빚을 갚는 양으로라도“선교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할 줄 믿습니다.

 

 또 우리는 예수의 작은 제자들이요 작은 디모데 같은 바울의 제자들입니다. 오늘 디모데와 작은 디모데 같은 우리에게 간곡히 당부로 권면한 바울의 교훈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라도 선교적 삶을 살아 가실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여러 희생을 무릎쓰고서라도 가까운 이웃에게 전도해야 할 이유이고, 해외에 선교해야 할 이유입니다. 성령님이 늘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깨닫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의 삶이 더욱 선교적 삶으로 변화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할렐루야!

 

                                                100222 안익선 목사/ 참조: 김상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