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하나님의 공의만을 구하자(이사야 51:4~8)

호걸영웅 2023. 1. 28. 05:06

                             하나님의 공의만을 구하자(이사야 51:4~8)

4.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으로 세우리라
5.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1.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2.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 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3. 옷 같이 좀이 그들을 먹을 것이며 양털 같이 좀벌레가 그들을 먹을 것이나 나의 공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


서론)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실망과 좌절로 시간을 보낼 때,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위로의 메시지들 중 일부입니다. 바벨론 포로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수치스러운 시대였습니다.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왕족과 귀족, 기술자, 중요 인사들이 모두 포로로 끌려 왔고, 그들의 꿈과 희망인 예루살렘 성전조차 무너지고 불탔으며,  젊은이들 은 미래의 소망과 자유를 송두리째 빼앗긴 노예의 상태였습니다. 그런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꿈과 희망도 잃어버린 채 자포자기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때를 이미 예견하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사야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장부터 39장까지는 주로 이스라엘과 열방의 죄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는 부분인데, 이를 ‘제1이사야’라고 부릅니다. 40장부터 66장까지는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는데, 이를 ‘제2이사야’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은 ‘제2이사야’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는 수치스러운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본론)
)먼저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 하십니다( 51:6)

이사야의 위로의 메시지는 “하늘로 눈을 들라”는 것이었습니다( 51:6). 우리의 도움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시편 121편에서도 우리의 도움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121:1)라고 한 바와 같습니다.

과거엔 많은 사람들이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나 환난을 당할 때나 절망적일 때 산을 찾아가는

본능이 있었습니다. 문명의 소란함을 벗어나 산에서 자연의 도움과 하늘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옛날의 우리 조상들도 산을 찾아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산신령이란 존재가 있다고 믿어 기도를 올리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높고 신비스러운 산이라 할지라도 그런 산에 우리를 도울 존재는 없습니다. 오직 그 산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또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또 다른 것 들에서 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재물이나 권력이나 지식의 과학과 의학만을 바라봅니다.

한때, 알프스 산을 넘어 전 유럽을 정복하였던 나폴레옹은 자신의 재능과 군대라는 힘을 의지하여   천하를 호령하였지만, 결국은 모두 실패하여 마지막엔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나는 실패하고 나사렛 예수는 실패하는 것 같았으나 그는 영원히 승리하였다”고 고백하며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살길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받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를 바라보고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여기에 참 행복이 있습니다.

) 땅 아래는 살펴야 합니다( 51:6)

본문에 보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고 하는 동시에 “아래의 땅을 살피라”( 51:6)고 했습니다. 내가 처한 현실 자체를 잊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사이비 이단 종파 가운데는 어차피 지나가는 ‘이 세상’보다는 ‘저 세상’이 더 중요하니, 가족이나 직장이나 다 팽개치고 무슨 기도원이나, 교회에만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 높이 가지를 뻗은 나무는 그 만큼 땅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처럼, 눈을 들어 하늘을 보기 위해서는 두 발로 튼튼하게 땅을 딛고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저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는 것과 동시에, 이 땅을 살피라 했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하루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 셨는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셔서 모세와 엘리야하고 함께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 광경은 가히 인간이 체험할 수 없는 황홀하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이곳에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했습니다(, 9:5, 9:33). 베드로는 당장 눈 앞에 하늘나라가 펼쳐지는 줄 알았습니다. 더 이상 고단하고 힘겨운 산 아래에 내려가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서 예수와 모세, 그리고 엘리야와 함께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꿈이면 깨지 말아라! 하며 말이죠.

그러나 예수께서는 잠시 후,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시고, 세 제자를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 습니다. 산 아래는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간질병 소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아이를 고쳐 주시고, 아울러 장차 자신이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의 희생을 치를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산 위가 아니라 산 아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의 사역의 관심은 언제나 이 땅 아래의 죄 많은 세상이셨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현실 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의 어둡고 아픈 현실을 치유하기 위해서, 이 땅을 고치기 위해서, 이 땅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를 수 있도록 관심가지고 기도하고 수고해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 땅의 문제도 풀릴 것이요 고쳐질 것이요 새롭게 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사야 51:5) =“내가 세울 정의가 홀연히 닥쳐오고 내가 베풀 구원이 빛처럼 쏟아져 오리라”고 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땅을 고치고 자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 길들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공의(Justice,미쉬파트)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땅을 살핀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다는 것입니다. ( 51:4)=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발할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했고, 6절에 서도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경우에도 공의(하나님 안에서 합법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이 세상에 밝은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이 부분이 약합니다. 개인적인 신앙은 정말 좋아 보이기도 합니다. 교회마다 찬양이 넘치고 열심히 기도하기도 합니다. 사회복지에 관련해서도 많은 일을 감당하고 있습 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선하고 감동적인 사례도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땅의 문제에는 둔감하고 정의로운 삶을 사는 데는 연약할 때가 많습니다. 많은 사회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도덕성에 대한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병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감성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사랑과 나눔이 없는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마음의 경건이 아예 없어서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성전을 다시 세우고 많은 소와 양의 번제를 다시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끔찍이 사랑하고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는데도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실천하는데 소홀하였습니다. 물질적인 축복만 바랄 뿐,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데는 인색하였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공의 실천이 너무 부족합니다. 맞는 것은 맞다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쉬울 것 같습니까? 꼭 그렇진 않습니다. 돈이 걸리고 이익이 걸리고 출세가 걸린 문제라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예화)
 16세기에 영국을 통치했던 영국의 헨리 8세가 하루는 예배를 드리는데, 그 날 따라, 래티머 주교 (H.Latimer 1485-1555)가 설교를 하면서 왕의 비행을 비난하였다고 합니다. 헨리 8세는 자신의 결혼 문제로 로마 교황과도 심각한 마찰을 빚은 후, 결국 로마가톨릭에서 벗어 나 영국 국교회를 탄생하게 한 강력한 왕이었고, 당시 그의 권위는 매우 대단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헨리 8세는 래티머 주교를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그대의 설교는 있을 수 없는 설교요. 그러나 오늘은 관대하게 용서하겠으니 다음 주에는 성도들 앞에서 오늘 의 설교 말씀을 취소해 주시오. 만일 취소하지 않으면 그대는 살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래티머 주교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 종이 아니냐?”라는 말씀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정의의 선지자가 되야지, 거짓 선지자가 되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 다음 주일 예배 시간에, 또 다시 왕의 불의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왕은 참으로 불쾌한 얼굴로 주교를 다시 불러서 말했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내 명령을 거역했는고?”그러자 래티머 주교는 태연하게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대로 설교 했으니, 왕의 처분대로 하겠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대는 죽음이 두렵지 않느 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교는 “하나님께 의무를 다하고 육신의 생명을 마친 후, 천국의 무궁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으니 오히려 기쁨이 넘칩니다.”라고 담대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헨리 8세가 무릎을 탁 치면서 하는 말이, “그대 같은 위대한 성직자가 우리 나라에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요. 이제 나도 그대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작정이요.”라 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래티머 주교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따라 살아가면 우리의 삶엔 반드시 그 아름다운 열매가 있을 것이요 거기에 따르는 축복과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고로 본문 3절은 이렇게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3=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 덴같게,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서로 함께 소리 높여 찬양함)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할렐루야!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항상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 다. 그러나 땅의 문제 또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정의를 실현하는 성도들 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2023년을 맞이한 둘째 주일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에도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010323 안익선 목사/참조: 전병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