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전도서 6장 강해(인생 허무에 대한 추가적 교훈 )

호걸영웅 2023. 5. 18. 22:14

전도서 6장 강해(인생 허무에 대한 추가적 교훈 )

찬송가 434, 439.
서론)

솔로몬은 6장에서도 인생 허무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이어 나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의 절기행사 때에 두루마리로 된 성경을 펼쳐서 읽습니다. 그 중에서 ‘메길로트(오축_다섯 개의 두루마리, Five Scrolls)’라고 불리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유월절에는 아가서를 읽었고, 칠칠절(오순절)에는 룻기를, 예루살렘의  바벨론 침공으로 인한 멸절의 날에는 예레미야 애가를, 하만이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했던 위기에서 극적으로 벗어난 날을 기념하는 부림절에는 에스더서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가을 추수 절기인 초막절 (장막절, 수장절)에는 전도서를 읽었습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3대절기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있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이 절기는 추수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인생의 추수기, 인생의 마지막에 있는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 의미가 훨씬 뚜렷해집니 다.

 

본론)

)좋은 외적 조건에도 누리지 못하는 허무함(1-6)
추수 절기 때에 읽는 전도서 본론인 1:12-12:8절에는 4개의 설교(강화) 가 있는데, 오늘은 3번째 부분의 설교입니다.


본문 1-6절은 재물과 부유함, 많은 자녀와 장수를 하였음에도 누리지 못하는 허무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

전도자는 ‘한 가지 불행한 일’을 보았고,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내용을 말하지 않고, 운을 먼저 띄우는 것으로 보아서 전도자에게도 체험적 억눌 림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어떤 사람이 경제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도록, 아니 지나칠 정도로 많이 가졌습니다. ‘재물’, ‘부요’, ‘존귀’는 모두 ‘부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특히 ‘존귀’는 ‘막대한 부자’를 뜻합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부를 다른 사람이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한때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은 아무리 큰 부자라도 병석에 수년간 식물인간인 상태로 누워 계셨었습니다. 그 분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을 지라도, 그 모든 재산이 그를 다시 되살리진 못했습니다. 또 어떤 거부는 죽고 나자 자녀들끼리 유산 상속으로 싸움에 싸움을 법정 투쟁에 투쟁을 거듭 이어 나감으로써 매우 안타까운 모습들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솔로몬은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교훈을 전하게 되었습니다(왕자들의 왕권 다툼 등등)  

 

고로 그는 어떤 사람이 재물과 부요, 존귀를 모두 갖고서도 그것을 누리지 못한 것은 ‘하나님 께서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누리고 누리지 못하고는 우리의 능력이나 의지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그렇지 않으심 에 달려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한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는 밭에서 소출이 풍성해지자 자기 마음에 생각하기를 지금 현재 곳간에는 다 쌓아둘 수 없으니, 그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서 거기에다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리라고 계획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에게 말했습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 부자는 자기 밭에서 추수된 것, 자기가 벌어들인 것은 자신이 전부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인생을 허무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3)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구약시대에 ‘자녀가 많은 것’과 ‘장수(長壽)_오래 사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복의 대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127편에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127:3-5)”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잠언 10:27상반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라고 증거합니다.

그런데 3절 말씀은 100명의 자녀를 두었을 뿐만 아니라 장수하여 오래 살았을지라도, 그 영혼이 평안함을 누리지 못하고, 제대로 매장되지 못한다. 차라리 사산아(死産兒)가 더 나을 것이라고 한 숨 쉽니다.


솔로몬 같은 왕 외에는 자녀를 100명을 두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최소한 아내들이 20명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아내와 결혼하려면 굉장한 부자이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100명의 자녀를 두었다는 말은 가문이 매우 번창하였 다는 의미입니다.

 

또 야곱이 요셉으로 인해서 애굽의 바로왕 앞에 서게 되었을 때에, 바로왕은 야곱에게 나이가 얼마인지를 물었습니다. 그 때의 야곱의 답변을 오늘 본문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 도’로 표현하면,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입니다. 내가 이렇게 길게 살았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고, 앞으로의 인생길에도 각종 장애물이 가득할 것 같습니다.”라고 해석함이 옳습니다.

(4-6)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의 이름이 어둠에 덮이니 햇빛도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알지도 못하나 이가 그보다 더 평안함이라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라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어서 나온 아이(사산아)는 세상을 보지도 못했고, 인생을 알지도 못했다 할지라도 곧 바로 안식을 누리지 않는가? 비록 1000년씩 두 번을 산다고 해도, 자기가 가졌던 것으로 평안함을 누리지 못한다면, 참 허무하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천 년의 갑절’이면 2000년입니다. 2000년을 산다면 예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사는 것입니다. 그 긴 세월을 살아도 삶에 만족을 누리지 못하면, 눈 한 번 떠보지 못한 사산아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장수의 삶에도 깊은 허무함이 있다 했습니다.

)
자족함을 누리지 못하는 허무함(7-12)
7-12절에서도 전도자의 허무함에 대한 탄식은 계속됩니다.
(7-9)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지혜자가 우매자 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살아 있는 자들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는가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7절에서 사람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러 가지 어려움과 속상함을 견디며 일을 하는 것은 입(먹는 것)을 위한 것이데, 그 식욕을 채울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9절에서 머릿속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직접 보면서 즐거움을 체험하는 것이 낫지만 그것도 아주 만족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먹는 것과 보는 것에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로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리고서 이 세상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이 세상에 있는 것 1번과 2번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즉 먹는 것과 보는 것입니다.

(10-12)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헛된 것을 더하 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 주신 일들이 있는데, 그것을 수용하지 않고 스스로 헛된 즐거움을 구하려고 하면 인생이 허무하게 됨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맞서보려 했던 여러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애굽의 바로왕입니다. 바로왕이 자신의 마음을 꺾지 않고 끝까지 버팀의 결과는 10가지 재앙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생각하기도 두려운 애굽의 장자들의 죽음입 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애굽의 군인들을 홍해에 수장시켰습니다. 하나님께 맞섬의 대가는 그만큼 컸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것을 중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실체가 아닌 그림자에 불과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결론)

오늘 본문에서 해 아래에서 전도자가 느끼는 허무함이 진하게 그리고 참 깊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비관적인 시선이 느껴지거나, 염세적인 가치관만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 위의 삶에 대한 갈망이 또렷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 해 아래에서의 삶은 아무리 많은 것은 가져도, 아무리 오래 살아도, 또 ‘재미있게’와 ‘의미있게’ 살아보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지나고 보면 모두 한 문장으로 정리가 됩니다. 그것은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만족의 참 삶을 사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 주신 자리에서 하나님께 속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해 위의 삶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좋고 분명한 길은 없습니다. 오늘 하루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헛되고 헛되니”가 아니라 “의미 있고 의미 있는 ”나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원히 건져주시지 않으셨다면 인생은 참 허무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재물로 부요와 존귀를 누려도, 많은 자녀를 낳고, 2000년을 산다할지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또 우리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아무리 많이 가졌을지라도 우리 속에는 허전함과 외로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결코 모르지 않으시기에 소망 가운데 거할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의 욕망을 다 채우려고 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가 지금 있는 삶의 자리가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곳임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오늘 하루는 물론, 우리의 매일매일이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나 “헛되고 헛되니”가 아니라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주님 인도하시니”와 “의미 있고 의미 있으니”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041423 안익선 목사/ 참조:
정한조 님             찬송: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