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전도서 8장 강해(지혜자와 우매한 자, 왕의 존귀함에 대해)

호걸영웅 2023. 5. 18. 22:18

                전도서 8장 강해(지혜자와 우매한 자, 왕의 존귀함에 대해)

 

서론)
8장은 총 4단락으로 구분 가능합니다.

1. 8:1 지혜자의 얼굴 , 2. 8:29 왕의 명령 앞에서, 3. 8:1015 모순된 현실들의 허무,
4. 8:1617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부터의 허무-입니다.

본론)
)지혜자에 대해

1절 말씀은 전도서 8장 전체의 서론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1="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지혜자를 가리켜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리의 해석을 알기 때문에 말을 해도 사리에 닿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해도 사리에 닿는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우매자는 그렇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리의 해석을 알지 못하기 때문 에 무모하게 처신하기 쉽습니다.

 

솔로몬은 이어서 지혜자에게 나타나는 하나의 특징을 말합니다. 1절 하반부="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참고; 링컨 왈; 사람은 자기 나이 40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나-고 함)

 

지혜로운 사람의 얼굴은 환하게 광채가 납니다. 예컨대 스데반 집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는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때 스데반 집사가 눈을 들어서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면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잠시 잠깐 후면 예수님이 두 팔을 벌리시고 자기를 품에 안으시며 위로해 주실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때 스데반 집사의 얼굴이 광채로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자의 얼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형통한 일을 맞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하면서 기뻐합니다. 그리고 곤고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크게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생각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슨 환경에서든지,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그 얼굴이 환하게 빛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다릅니다. 7:9에 기록된 대로 우매자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었습니까? 마음이 급한 것입니다. 쉽게, 성급하게 노를 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매한 사람은 아무래도 적은 일에도 쉽게 얼굴이 일그러지게 마련입니다.

곧이어 솔로몬은 2절 이하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사리에 맞게 처신하는 모습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첫째로, 왕이 명령을 내릴 때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왕이 옳지 못한, 그릇된 명령을 내릴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신하로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인지 29절에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2)두번째로, 우리가 모순된 현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땅에서 의롭게 사는 사람이 잘되고, 또 악인들은 잘못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악인은 오히려 형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순된 현실입니다. 이런 모순된 현실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처신하는가? 이것에 대해 1015절에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3)세번째로,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상식이나 지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하늘과 땅이 차이입니다. 그러니 이 작은 머리로 어찌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 지혜로운 자는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이것이 1617절 말씀에 나옵니다.

) 왕의 명령 앞에서
왕이 명령을 내릴 때 지혜로운 사람의 처신에 대해 29절은 교훈합니다.

솔로몬이 본문의 말씀을 기록할 당시는 왕은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왕의 말 한 마디가 신하의 목숨을 좌우하던 때였습니다. 우선 2절에서 솔로몬은 하나의 원리를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권하노니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신하가 왕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마땅한 도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옛 이스라엘에서는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움을 받기에 앞서서, 왕과 백성 사이에 서로 언약을 맺습니다.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왕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왕의 통치에 복종하겠 다고 맹세했으면 또 마땅히 신하는 왕의 명령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한 것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신하가 왕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신하가 생각하기에 불합리한, 뜻에 맞지 않는 명령을 왕이 내릴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3="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거히 말며."
라 했죠?

아무리 자기 생각과 다른 명령을 왕이 내린다 할지라도 신하가 얼굴을 붉히면서 듣기 거북하 다는 듯이 왕 앞에서 급히 분 내며 뛰쳐나가는 것은 무례한 행동입니다. 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왕이 싫어하는 것, 왕에게 해가 되는 것 등을 꾀해서는 안 됩니다. 신하가 왕을 배반하고 반역하는 것은 벌받아 마땅합 니다.
왜 그런 것을 해서는 안됩니까? 그 이유가 3절 하반부∼4절에 나옵니다. 왕은 어떤 사람입니 까?  "왕은 그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고 합니다.
왕에게는 절대 권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왕정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지요.

 

그러면 신하가 생각하기에 도저히 왕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기에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5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시기와 판단을 분변하나니."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으로 처신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니엘과 세 친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3년 동안 내가 주는 진미와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훈련을 받아라."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들의 몸을 더럽히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개적으로 왕이 하사하는 음식을 거부하면 왕명을 어기는 셈이 되니까 목숨이 위태롭게 되지 않습니까?
그때 다니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다니엘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들을 감독하는 자를 찾아가서 이렇게 제의를 했습니다. 왕이 주는 포도주와 진미 대신에 채식과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열흘 동안 시험해서 그 결과에 따라 감독자의 좋을 대로 처분하라고 했습니다. 3년 가운데서 열흘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감독자가 다니엘의 제안을 좋게 여기고 수락했습 니다.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자기가 대신 취하고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는 채식과 물을 주었습니다. 열흘 동안의 시험기간이 끝났습니다.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그들의 얼굴이 다른 동료 소년들보다 윤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음식으로 자기들의 몸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동을 취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시기와 판단을 분변하지 못하고 무모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화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장차 당하게 될 화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옆 사람이 말해 주어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매한 사람이지요.

) 모순된 현실 앞에서
세상에서 모순된 현실을 볼 때 어떻게 처신해야 지혜로운 것입니까? 1015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본즉 악인은 장사지낸 바 되어 무덤에 들어갔고."
악인이 죽었습니다. 그를 위해서 성대하게 장사가 치러졌습니다. 좋은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선을 행한 자는 거룩한 곳에서 떠나 성읍 사람의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반대로 선을 행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의로운 일을 행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니면서 예배드리던 거룩한 곳을 떠나는 순간, 그가 살던 성읍을 떠나는 순간 그는 사람들의 잊어버린 바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기억해주지 않았습니다. 초라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이것도 헛됩니다. 얼마나 부조리합니까? 모순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만 그와 같이 모순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을 때도 얼마든지 모순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11절입니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악한 일을 해도 벌받는 일이 속히 일어나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겁 없이 악을 행하더라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 "죄인이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라고 합니다.
계속해서 악을 행하는데도 죽지 않고, 벌받지 않고 오히려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12절 하반부="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될 것이요."
솔로몬이 지금까지 알아온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로운 자는 잘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절 말씀입니다.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12절과 대치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충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13절에선 대부분의 악인을 말합니다. 그러나 12절처럼 소수의 악인이 장수하기도 합니다.


악한 사람이 잘 안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14절을 보시겠습니다.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오히려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합니다.
이런 모순된 현실을 보면서 여러분은 결론을 어떻게 내리시겠습니까? 잠시 이 땅에서 잘살기 위해서 악을 행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의미가 없습니다. 잠시 잠깐의 낙을 누리기 위해서 영원한 형벌을 자초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11절의 말씀처럼 악한 일의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는다고 해서 담대하게 악을 행하는 인생을 살아가시겠습니까? 왜 이 땅에 심판이 속히 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인생들로 하여금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는 자리에 이르는 것을 원하셔서 인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금도 오래 참고 계신 것입니다.

결론)

솔로몬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라 했어요. 희락은 기쁠 희(), 즐길 락()자입니다. 기쁘게 살라는 것입니다. 즐겁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하나님이 주셨으면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형통하십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기뻐하고 감사하세요.

 

곤고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그 가운데도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생각하시고, 마음의 평강을 빼앗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 속에서도, 잠시 잠깐 뒤에 처형당할 자리에서도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 안에서 기뻐했던 것처럼 범사에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042823 안익선 목사/ 참조: 승동교회 설교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