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전도서 7장 강해(지혜자의 태도와 선택& 지혜의 본질)

호걸영웅 2023. 5. 18. 22:17

전도서 7장 강해(지혜자의 태도와 선택& 지혜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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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2장으로 된 전도서는 1-6장에서는 해 아래에서 하나님을 떠난 삶은 허무한 것임에 대해서, 그리고 7-12장은 하나님을 경외함을 통해, 해 위의 지혜적 삶에 대해 증거합니다.

 전도서 7장은 솔로몬의 세 번째 설교의 중간부분입니다(6:1-8:14).


)지혜자의 태도(1-7)

오늘 본문 1-7절은 ‘지혜자의 태도’에 대해 증거합니다.
(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좋은 기름’은 감람(올리브)나무에서 추출한 감람유(올리브유)입니다. 이 기름은 식용으로 사용된 것은 물론, 피부의 건조를 막는 의약품과 화장품으로도 사용되었고, 잔치와 장례에도, 성전에서 불을 밝히는 용도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왕궁의 보물목록에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기름은 ‘재산’이나 ‘재능’, 건강 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이름’과 ‘기름’이 끝 자가 같지만, 히브리어로는 첫 글자가 같습니다. 그래서 이름과 기름을 비교하고 대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기름(재산, 재능)과 이름(명 예,명성,존재가치) 중 무엇이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한지를 저울질을 하면대개는 ‘기름’ 쪽으로 천칭이 기웁니다. 종종 “이름이 밥 먹여주나?”라고 이름을 비웃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갈수록, 살아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수록 ‘이름(명성, 명예)’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곤 합니다.

(2-4)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마음이 편하기로 하면 장례식장보다 결혼식장이 훨씬 낫습니다. 장례식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울며 슬퍼하지만, 결혼식장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웃습니다. 무엇보다도 결혼식 장에는 먹을 것이 풍성합니다. 과거 가난한 시절에 결혼식은 평소에 먹지 못한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장례식장에도 음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잘먹고 배불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90 100년 동안 살며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나면 그래도 덜 서운하지만, 어린 자녀들을 둔 가정에서 젊은 부모 중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남아 있는 가족들은 삶의 질이 완전히 곤두박질 칠 것입니다. 또 부모는 돌아가시면 뒷산에 묻지만 자녀는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자녀를 잃은 장례식에 조문을 가면 그 누구든지 마음이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또한 아주 가까이 지내던 지인이나 친한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삶의 허망함이 표현하지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은 확실히 결혼식보다는 장례식장 앞에서 인생을 깊이 생각하고 영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이 초상집에 있다고 했습니다.


(5-7)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

꾸지람이나 책망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실 꾸지람과 책망을 들을 때는 이미 마음이 많이 상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상대가 말하는 것이 거의 들리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책망의 내용은 틀린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에, 그 말을 중심으로 듣고 자신에게 적용하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탐욕이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은, 탐욕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자(솔로몬)가 이 고백을 하는 것은 자신이 산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에게는 최고의 지혜가 있었지만, 국력을 더 크게 하고, 자신을 세상에 더 드러내게 하고 인생을 너무 즐기려는 탐욕이 그의 눈을 멀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지혜자였던 그는 나라가 두 동강나게 한 원인제공자가 되었습니다. 뇌물에게도 사람이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뇌물에 오염이 되고 나면, 정의보다는 돈의 편에 서게 됩니다.

)
더 나은 선택을 하라(8-14)
8-14절은 ‘더 나은 선택’에 대해 증거합니다.

(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독일 속담에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Ende gut, alles gut)’는 말이 있습니다. 바른 끝맺음은 이전의 삶도 아름다운 의미로 승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레미제라블). 또한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은 것은 당연합니다. 참을 인자 세번이면 살인도 면한다 했습니다. 참는 것은 성령의 열매이기도 합니다(Be Patient).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조심해야할 것은 1번이 교만이고, 2번도 교만이고, 3번도 교만이요, 99, 100번도 교만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지날 때에 끊임없이 애굽에서 있었던 일, 특히 거기서 값없이 먹었 던 생선, 오이, 참외, 부추, , 마늘 등을 떠올리며 불평했습니다.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은 지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2)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표준새번역. 12)= 돈이 사람을 보호하듯 지혜도 사람을 보호합니다. 그러나 지혜를 깨우쳐 아는 지식이 더 좋은 까닭은 지혜가 그 사람의 목숨을 살려주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어요.
(;아비가일과 나발의 비교, 기생 라합, 요나단의 결단 등)
돈과 지혜가 사람을 함께 보호하지만, 목숨을 살려내는 것은 지혜라고 합니다. 돈이 사람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의 거의 대부분은 한계적이요 외적인 것입니다. 그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에도 많은 도움을 주긴 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와 질문 앞에서는 결코 답을 줄 수 없습니다. 그 때는 반드시 지혜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오직 그 지혜만 우리를 궁극적으로 영생을 주고 구원을 얻게 합니다. 고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오직 위로부터만 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1:5)”고 했습니다.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함께 두셨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무능하시기 때문이거나 우리를 외면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으로, 또 최상으로 충분히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를 안다면, 우리가 더 바르게, 더 신실하게, 더 부유하고 더 의미 있게 살 수 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섭리’의 ‘섭()’자가 ‘당기다. 쥐다’의 뜻입니다. 그 한자에는 ‘손 수()’ 변에 ‘귀 이()’ 자가 3개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듣고, 듣고, 또 듣는 것입니다. 그 듣는 것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듣고, 삶으로 듣는 것이고, 과거를 듣고, 현재를 듣고, 미래를 듣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깊은 지혜적 진리입니다.

)절제와 바른 선택(15-22)
15-22절은 절제와 바른 선택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8)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15절에 있는 것처럼 의롭게 살아도 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하게 살아도 망하지 않고 오랫동안 장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의로운 삶과 악한 삶을 왔다 갔다 합니다.

 

또 의롭게 사는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것은 굉장히 칭찬을 받아야 하는데, 그가 자신의 의로움을 과도하게 내세우다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거나 손해를 보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하 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또 악하게 사는 것만 해도 바르지 않는데, 그렇게 사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더 과도하게 악한 일을 행하다가 자기가 행한 악에게 무너지는 사람도 참 많습 니다. 고로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길어질수록, 또 인생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더욱 더 분명해지 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사는 것에는 후회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은 영원하고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
지혜의 무궁함(23-29)
23-29절은 ‘지혜의 무궁함’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전도자는 궁극적인 지혜를 찾는 것이 정말로 어렵다고 말합니다. 지혜를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오히려 미궁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지혜는 우리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은 결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유한한 존재가 영원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영원한 지혜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 라고 하십니다.

전도자가 인생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29절에서 고백하며 오늘 본문의 막이 내립니다.
(29)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한 길-진리와 생명의 길’을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죄를 범한 이후로 언제나 ‘여러 길’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부작용이라 할까요? 그것이 사람들이 꾀를 낸 것입니다. 우리가 짓는 죄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생각하는 제 3의 길, 4의 길을 제시하여 살려고 합니다. 바벨탑을 쌓아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셔도, 우리는 그것이 더 낫다고 스스로 우겨댑니다. 하지만 지나고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길이 더 옳았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결론)

우리 앞에는 언제나 인간의 지혜 또는 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놓여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우리의 자유지만, 그 결과도 우리의 삶에 고스란히 남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고 순종함으로써 우리의 남은 믿음의 삶의 여정이 늘 평강과 축복 가운데 늘 머물기를 간구합니다.


               042023 안익선 목사/ 참조: 정한조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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