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하나님의 관점(창세기 22:9-14)

호걸영웅 2023. 7. 6. 06:25

하나님의 관점(창세기 22:9-14)
   

   9.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서론)

1. 어느 도둑이 부잣집을 털고 난 다음, 그 집 다음에 있는 이웃 집에 들어갔는데…… 모자간의 두런 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머니 왈, "아들아, 먹을게 하나도 없구나."라고 헸습니다. 도둑은 이 집은 너무 가난한 집이다 싶어 마음이 아파집니다. 그러자 아들 왈, "엄마, 그럼 똥이라도 먹어요."라고 했습니다.  도둑은 그들이 너무나 불쌍한 생각이 들어 문 앞에 훔친 돈의 얼마간을 놓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두 모자는 내기 화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사건을 귀로 들었다고 해서 다 들은 것이 아닌줄 알아야 합니다. 또 눈으로 보았다 고 다 본 것이 아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파란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보면 온 세상이 파랗게 보입니다. 노란 선글라스를 끼고 보면 온통 세상이 노랗게 보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안경으로 세상을 보기 일쑤입니다. 여기 자신이 쓰고 있는 안경을 우리는 관점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자신이 가진 많은 직간접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안경 즉 관점을 만들어 온 것입니다.


3. 죄인들이 쓰고 있는 안경들은 모두 죄로 물들고 오염되어 있기에 세상을 바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때로는 보고 싶어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신앙이란 자신의 안경을 벗고 하나님의 안경을 쓰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내 안경 벗어 던지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안경을 내게 주십니다. 내 안경을 얼마만큼 벗어 던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본론)

)하나님의 관점에 대해 이해합시다.

 토미 테니란 분이 쓴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책의 서문은 자신의 막내딸이 서너 살쯤 되었 을 때, 엘리베이터에서 함께 가진 경험으로 시작됩니다. 어린 딸이 엘리베이터를 타자, 잘 장식된 내부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층 한층 사람들이 밀려들고 엘리베이터 안이 사람 으로 꽉 찼을 땐, 예쁜 장식들 대신 사람들의 무릎, 허리띠, 엉덩이만 보였습니다. 그때 당황한 아이가 아빠(토미 테니)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안아주세요. 답답해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잘 보였으면 좋겠어요."
아이를 안아 아빠의 눈높이만큼 올려주자 아이는 아빠가 보는 것만큼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
토미 테니는 "아빠, 안아 주세요. 아빠 눈높이 만큼 보고 싶어요."라는 요청이 바로 신앙이요 기도요 예배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아빠의 품에 안겨, 아빠와 같은 눈높이 즉 아빠의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겁니다.
고로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으로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창공에 오르면, 아래 있는 것들은 뭐든지 작게 보입니다. 집도 학교도 아파트도 산들도 작고 귀엽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겨 높이 올라가면 이 땅에서 그렇게도 크고 중요하게 보이던 것들이 모두 작아 보입니다. 가정, 직장, , 갈등, 고민, 문제 등등 모두가 작아 보입니다. 왜요? 관점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고로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낮은 차원의 관점을 높은 차원의 관점 - 즉 하나님의 관점까지 끌어올 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의 산 모리아 산에 대해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내어놓은 순종의 절정을 경험했던 사건입니다. 성경연구가 제임스 스트롱 "모리아" 라는 뜻이 "(Jah)께서 보신다 -즉 야훼께서 보신다"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모리아 산"은 「하나님의 관점의 산」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에게 처음엔 모리아 산이 모진 시험과 고난의 산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아브라 함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난 산, 하나님의 관점을 얻은 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높은 시험의 산, 고난의 산으로 인도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이 나를 망하게 하고 나를 좌절시키는 산으로 알고 힘들어합니다. 가능하면 거기서 도망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오르면, 그 시험의 산은 하나님의 관점을 얻는 산이 될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신약 최대의 사건이 갈보리 십자가 사건이었다면 구약 최대의 사건은 모리아산 사건, 즉 아브라함의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던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본문이 주는 메시지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큰 시험을 주신 이유는 큰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 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기까지 시험은 고통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랜 옛날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잔인하리만큼 힘겨운 하나님의 관점의 산에 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관점의 산으로 인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 하나님의 관점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우상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갖기까지 우리의 눈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에게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재산이 귀했겠습니까? 이제 와서 건강이 귀했겠습니까? 명예가 귀했겠습니까? 독자 이삭입니다. 가장 귀한 것, 생명 보다 귀한 것 -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달라고 하십니다. ? 내게 하나님의 관점을 빼앗아 가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건 우상입니다. 내가 지금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어 그것이 내 눈을 가리고 있다면 하나님은 지금 그것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1. 본문 2절에 보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내 것" - 내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험이요 우상이요 잘못된 관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에게 내 것이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그 무엇을 내 것이 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요 시험이 됩니다. 하나님께 그것을 바치기 전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관점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신앙없이 그 무엇을 받아도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이삭이라는 안경으로 그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고로 하나님께선 이삭을 내려놓으라고 하셨습니다.
2. 당시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이 땅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 하나뿐인 아브라함의 급소였습 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치셨습니다. 너무 잔인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이 급소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관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엔
① 물질의 급소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② 자기 생각, 자기 경험, 자기 지식, 자아가 급소인 사람이 있습니다. ③ 자존심, 명예가 급소인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치라고 말합니다. 짤라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관점이 다시 생깁니다.

)예배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어지간해선 순종하기 어려운 난제입니다. 번제란 제물의 각을 떠서 온전히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멀쩡히 산 사람을 죽여 짐승처럼 불태워 제사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무조건 바치라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저항하지 않습니다.
*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진실한 성도는 언제나 ""라고 묻지 아니하고 "무엇 을 할까요?"라고 묻는다." 라고 한 바 있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관점이어야 합니다.

) 하나님을 크게 보세요(Magnify)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라고 했어요.
아브라함도 인간인지라, 간밤엔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고민하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아침이 밝아오자마자 머뭇거리지 아니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할 아들의 손을 붙들고 사흘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모리아 산은 그가 살던 브엘세바에서 45km(28마일)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그러나 그는 온전한 순종을 위해서는 삼일간의 인내를 감당했습니다.
광야 길 갔던 아브라함의 심정을 스펄젼 목사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헤브론 광야길은 적막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식을 죽여야 하는 아비의 마음보다 적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구요. 이제 모리아산 아래 도착하자 하인들을 떼어놓습니다. 하인들이 순종과 번제에 방해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아들 이삭의 이 한마디가 아비의 마음을 갈갈히 찢어버립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그러나 아브라함이 뭐라고 말합니 까?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 말은 위대한 예언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황급히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11-12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되었음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안경은 참 신비합니다. 우리의 문제, 고난, 환란은 시시하게 보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만 위대하게 보입니다. 그분만 크게 보입니다. Magnify God! 할렐루야!

결론)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이레」의 제물을 미리 준비하십니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이것이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면 하나님이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을 확대하면(또는 찬양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제나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Eye)이 있기 전에 이미 빛을 준비하셨습니다. 코가 있기 전에 숨쉴 공기를 준비하셨습니다. 발이 있기 전에 밟을 땅을 준비하셨습니다. 입이 있기 전에 맛있게 먹을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갈데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치료하심과 회복력을 준비하시고, 마음이 공허한 사람에게 하늘의 위로를 준비하시고, 갈등과 번민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평안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멸망해 마땅한 죄인들에겐 구원의 십자가와 어린 양 예수를 준비하시고, 지치고 피곤한 심령에게 새 힘을 주시고 근심있는 자에게 평강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죄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사죄의 은총을 준비하시고, 가난에 지친 사람들을 위해 부요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보고 이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내 인생의 내일을 보는 자세입니다.

어디서죠?  여호와의 산에서입니다. 아무 산에서나 바치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2절에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입니다. 그곳이 여호와의 산입니다. 여호와의 산 - 모리아가 어디입니까? 이삭이 바쳐진 자리요 예루살렘 성전이 선 자리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죽으신 산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서 서야 할 산은 곧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과 성령과 선지자를 통해 그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예수 안에 서 계십니까? 그를 모시셨습니까? 아니면 주변만 뱅뱅 돌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아니면 나의 어떤 것은 도무지 하나님께 바칠 수 없습니다. 아직은 못합니다 라고 외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가 바라기는 이 예배가 여러분의 믿음을 다시 점검해 보시는 복된 예배가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061323 안익선 목사/ 참조:
류영모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