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인생의 ABCD ? (롬 13:11~14)

호걸영웅 2023. 12. 18. 08:36

인생의 ABCD ? ( 13:11~14)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밤이 깊고 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서론)

한국에서 큰 교회를 목회하시는 김지철 목사님의 설교에 보면, “인생은 영어 알파벳의 ABCD와 같다”라고 표현한 부분이 있습니다.  저도 거기에 힌트를 얻어 오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그럼 왜 인생은 ABCD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론)

가) 인생과 알파벳

먼저 알파벳 첫 글자 A Affection, 즉 애정, 혹은 애착이란 뜻입니다. 산다는 것은 곧 사랑에서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온 우주와 인생이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이 우주의 질서, 우주의 아름다움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실례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또 그 위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이 있었어요(촌스럽건 말건?). 그분들이 서로 사랑하고 가족들이 축복했기에, 우리들의 인생이 시작되었고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두 번째는 B Birth, 즉 출생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응아 응아하며 울어야만 했습니다. 태아가 안 울면 산파가 궁뎅이 때려서라도 울게 합니다. 그런데 그 울음소리를 반가워하며 기뻐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가족들입니다. 울어야 호흡이 트이게 됩니다. 대를 이어갈 인간의 생명은 어떤 생명이든 축하 받을 권리와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C는 바로 Choice, 즉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출생과 죽음사이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생을 선택하면서 살아 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선택과 결단의 과정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지금 내가 여기까지 온 것도 나의 결단과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미국이냐 한국이냐! 대학의 어느 학과냐? ). 앞으로 우리의 남은 생애 역시 내가 어떤 결단을 하고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신앙도 올바르게 분별하고 선택하며 결단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D Death, 즉 죽음입니다. 인생의 시작이 출생이라면 인생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장례식장에서 자주 대하는 말씀 중,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흙에서 와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인생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마치 들에 핀 들꽃같이 한참 피다가 시들어 사라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100년도 못 살지만 천년을 살 것처럼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많습니다만결국 죽음 앞에선 굴복할 수 밖엔 없습니다.

 

결국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나 선택하며 사는 살다가 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선택은 무슨 상관 관계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와 섭리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내가 너에게 복 주겠다. 내가 너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겠다. 내가 너를 구원하겠고 저 하늘의 지혜를 주며 영생을 주겠다.’고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옳은 것을 향해서 결단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순간에도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을 파괴하지 않으십니다. 고로 로보트로 만들지 않으시고 선택하는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신앙은 결국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올바르게 분별하고,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두 가지 서로 대비적인 단어가 계속 나옵니다. 밤과 낮, 자는 것과 깨는 것, 어두움의 일과 빛의 갑옷, 그리고 육신의 일-방탕, 술 취함, 음란, 호색, 다툼과 시기-등과 대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본문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로마서 13:12)라고 했어요.

 

  어둠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참된 빛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달과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반사체에 불과합니다. 발광체는 오직 하나님이시요, 아들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이 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빛을 비추려면 예수님 주님 앞에 나아와 그분의 빛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런 과정 중의 하나가 예배입니다. 이것은 빛을 바라보며 빛을 흡수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인생은 놀이터인 동시에 전쟁터입니다

    인생은 놀이터(playground)이면서 동시에 전쟁터(battlefield)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놀이터로 초청하셨으니, 우리는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감사하면서 뛰어 놀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터전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들어와서 그 놀이터를 파괴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놀이터는 전쟁터가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의 삶은 적을 물리치고 승리해야 하는 긴장과 격렬한 투쟁이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불평과 불만을 갖고 다른 사람을 헐뜯고 덤벼들어 공격하는 삶을 살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른 삶이라 하긴 어렵습니다. 반대로 지금은 전쟁터인데 너무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우다가 그 전쟁터에서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적당히 긴장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어떻게든 합해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놀이터 (playground)와 전쟁터(battlefield)를 합한 운동경기장(sports-ground)라고 합니다. 그런 것들이 올림픽 경기, 아시안 게임, 월드컵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즐거움이요, 또 하나는 전투적인 긴장감입니다. 경기장 안에서 뛰는 선수들에게는 경기 규칙이 있습니다. 그들은 경기의 규칙 안에서 상대방 을 이겨야 합니다. 그럼 그런 삶을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룰, 규칙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 님 말씀이죠. 그 룰 안에서 살아야 바르게 사는 것이요, 실격을 당하지 않고 사는 삶이 됩니다.

)삶을 즐거워 하되 쾌락에 빠지진 말라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놀이터와 전쟁터를 함께 주셨습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삶을 즐겨야 합니다. 먼저 먹고 마시는 것과 나와 연관된 인간관계도 사랑하며 즐거워 해야 합니다. 내게 주신 직업의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어지럽게 하는 사단의 세력들이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본능적인 쾌락만을 추구하게 하고 이기적인 탐욕을 만들어내어 우리를 무너뜨리려 하는 세력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과 축복의 현장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이 때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삶을 사는 두 가지의 극단적인 방식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금욕주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방탕(혹은 쾌락)주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서 큰아들은 금욕주의적인 삶을 대표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규칙을 잘 지켜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그는 수고했고 땀 흘렸고 집밖에는 별로 나가본 적도 없었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같이 나쁜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 아들을 꾸짖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주어진 규칙대로 잘 살았지만, 기쁜 마음으로 살지 않고 마지못해 억지로 복종했습니다. 그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것이 내 것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기뻐하면서 산 것이 아니라, 마치 종처럼 내가 아버지에게 무언가 얻어먹을 것은 없는 지 눈치를 살피며 자기 에게 맡겨진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부심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그를 향해서 꾸짖으십니다. “네가 모든 걸 잘했다. 그런데 내 것이 다 네 것인 줄을 몰랐더냐?”고 하십니 다.  아들이 갖고 있는 특권을 잊어버리고 놓치고 살았을 때, 그의 인생은 아버지께 꾸중을 들을 만큼, 그 마음속에 너그러움이나 사랑이나 관대함이나 감사나 기쁨이나 믿음 등이 사라 진 까닭입니다. 

 

  반면 방탕주의를 대표하는 둘째아들은 쾌락만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교훈과 책망 을 거부했습니다. 그에게는 절제하는 규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졌던 돈과 재물을 한 순간에 탕자들의 친구과 탕진하고 맙니다. 그토록 좋아했던 친구와 미인들은 그의 돈이 사라지자 금방 그의 주위를 떠났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돼지나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며 허기를 달래야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주신 축복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는 즐거움을 추구했 지만 그것은 사실 쾌락과 방종이었습니다. 그의 선택은 완전한 실패였어요.

 

)분별하고 절제하라

  우리는 인생을 행복하게  잘 살아가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먼저는 즐거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에게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에도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먼저 분별력입니다. 그리고 분별력과 함께 절제력이 필요합 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별력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십니다. 분별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한 생각의 노동이 있어야 합니다. 분별력을 갖는다는 것은 정신적인 노동이요 영적인 노동의 결과입니다. 분별력은 자동적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기독교 변증가였던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름뱅이들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지식적인 게으름뱅이들은 더더욱 좋아하지 않으십니다.”라 고요.   우리가 육체적으로 게으름뱅이가 된 것은 이미 정신적으로 게으름뱅이가 되었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타락에 빠지는 것은 이미 지적인 분별력과 절제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며, 우리가 지적인 게으름에 빠지면 생각과 판단이 정지됩니다. 그래서 지적인 게으름 은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체적인 게으름을 죄라고 말씀하셨듯이 지적인 게으름 속에서 분별력을 잃어버리는 것 또한 더 큰 죄악이 됩니다. 그것은 참된 삶을 포기하는 것이며 삶이 가지고 있는 특권을 모두 놓치는 원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시대가 지니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별하기를 싫어한다는 게으름입니다. 그냥 편안한 것이면 다 좋은 것입니다.   정치가 국가의 이익을 도외시하고 당리당략에 빠지면 그것은 분별력 없는 정치가 됩니다. 기업이 국민의 건강과 풍요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의 이익만 탐하면 악덕 기업이 됩니다. 그것은 그들의 무분별함 때문입니다. 교육이나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분별력을 가지고 빛 되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로마서 13:13~14)=“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 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부분은 성자 어거스틴이 회심할 때 읽었던 유명한 성경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구절을 딱 읽는 순간에 받은 충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에게는 좀 더 읽어봐야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고, 더 읽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의 마지막 부분에 눈이 가는 순간, 마치 한줄기 광선 같은 확신이 갑자기 내 마음속에 밀려들어와 온갖 어둠과 의심을 내쫓아버렸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듣고 자기 속에 어둠과 방탕과 음란 과 호색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순간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빛이 없었기에 밤에 잔 것은 지난 날로 충분하며, 낮에까 지 잠을 자면서 침대에 누워 뭉개는 것은 죄요, 방탕이요 무절제의 게으름이다-라고요.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속에 있는 어둠을 이겨 나가려면 우리가 빛의 자리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가슴에 모셔야 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원래 우리에게는 빛이 없었습니다. 빛 되신 예수를 모셔야 우리 인생도 빛을 발합니다. 아직 예수가 없는 분은 안 계십니까? 오늘 기도하십시오. “예수님, 저에게 와주세요. 제 안에 들어와 주세요. 저를 비춰주세요. 저를 통해서 이 땅에 빛을 발하여 주세요. 저에게 참된 하나님의 분별력을 주시고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와 담대함을 주세요.”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결과는 선택의 결과입니다. 빛이냐 어둠이냐 선택하십시오.

 여호수아는 여호수아 1장에서 선택의 문제를 강하게 선포했습니다.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택하겠노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시요 성령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그런 선택이 여러분의 인생을 영멸이냐 영생이냐, 천국이냐 지옥이냐! 로 인도 합니다. 성공이냐 실패냐로 인도합니다. 사랑이냐 미움이냐로 인도합니다. 분별력과 절제함을 잘 활용하십시오. 인생은 놀이터이자 전쟁터입니다. 그러나 룰을 지키십시오. 인생의 놀이터에서 하나님의 규칙 밖에서 싸우고 겨루는 일은 실패뿐입니다. 그런 선택이 이번 한 주간에도 저와 우리의 선택이 되길 바랍니다.

 

121023 안익선 목사/참조:김지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