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누가복음 10장 강해( 70제자의 파송과 참 이웃에 대한 교훈 )

호걸영웅 2023. 12. 18. 08:44

누가복음 10장 강해( 70제자의 파송과 참 이웃에 대한 교훈 )

 

서론)

 

10장은 크게 4가지 주요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70인의 전도단의 파송, 2)전도 이후의 그리스도의 교훈, 3)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4) 마리아와 마르다의 교훈 등입니다.

 

본론)

 

) [ 10:1-16] 70 제자를 파송하심.

지난 주 공부한 9장에서 예수께서 성과 마을에 12제자를 파송하신 뒤에(9:1), 곧 이어 70인을 세워 둘 씩 짝을 지어 전도하도록 내어 보내셨습니다(1). 추수할 것이 많은데 일군이 적다(2)시며 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해 주십니다. 아울러 제자들에게 귀신과 병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과 권위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12제자를 파송하시는 기사는 마태, 마가, 누가가 함께 기록했는데, 70제자 파송은 누가 복음만 기록하고 있음이 특이합니다(1-20).

 

누가는 복음이 왕성하게 확산되는 예수님 사역 후기 부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70인의 제자들은 12제자와 동일한 방식으로 전도의 활동을 했습니다. 집에 들어갈 때 평안을 선포했고, 평안의 축복을 받은 집에 머물며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습니다(9).

 

그리고 만약 그들이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거든 거리에서 먼지도 떨어버리며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고 전하도록 했어요(11). 70인 전도대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전했습니다(9, 11).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성취하여 성령을 보내심으로 임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14:17). 이 세가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예수께서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 지역(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에 대해서 회개하는 두로와 시돈과 비교하면서, 소돔의 때보다도 더욱 엄중한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13-15, 11:20-24). 고라신은 갈리 바다 북중부 도시인데, 가버나움과 벳세다 가운데 있습니다.

 

벳세다는  갈릴리 동북부에 있고,  베드로 안드레 빌립의 고향(요1:44)이며,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성경에서 언급되는 유대 마을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의 고장, 예수의 집이 있는 곳이라고 불릴 정도로 예수의 공생애와 밀접한 곳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 , 요한이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관에서 일하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도 이곳에서 예수를 만나 제자가 되었어요. 복음 전도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구원하는 유일한 수단이면서, 복음에 순종하지 않은 자에 대한 심판의 의미까지 있습니다.

 
복음전도는 노방전도, 축호전도, 관계전도 등 다양하게 이뤄져야만 합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자들, 예비된 자들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러한 잃은 양을 찾는 전도자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인격 관계를 형성하며 삶 속에서 복음을 전도하는 방식도 효과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전도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동이고, 주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면 그 후는 수용자의 태도로 결정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께서 보내신 제자들의 말을 듣는 것은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들을 무시하고 외면함은 곧 예수를 저버리고 멸시하는 일이 됩니다(16). 예수께서 보내신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전했고, 오순절 이후 주의 사역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온 것을 성령 오심과 함께 이적을 행하며 전도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 [ 10:17-24] 70인 전도 이후 보고와 교훈들

70인은 활동을 끝낸 뒤에 예수께 기뻐하며 돌아와서 사역보고를 했습니다(17). 예수께서 그들의 사역으로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셨다고 했습니다(18). 그리고 전도자들에게는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결코 해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9). 그리고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하늘에 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권면하십니다(20).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음을 가진 사람들 뿐입니다. 복음의 사람은 하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또한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사람의 이름도 하늘에 기록될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전도자는 자기가 전한 사람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될 유익과 기쁨을 알고 체험하게 됩니다.예수께서 70인의 보고를 들으면서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21). 그리고 아버지께 기도했어요(21). 70인의 전도 보고로 삼위일체 현현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어른들에게서 아니라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며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세상에 아들 하나님, 곧 예수를 나타내시고 또 나타낸 그 아들 예수를 믿는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3:16). 그 하나님의 일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22). 그리고 제자들에게 복이 있음을 선언하십니다(23). 그것은 구약 선지자들이 보고 싶고 사모했던 “그 메시아”를 지금 그들의 두 눈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영접한 우리도 “그 메시아”를 믿음으로 봅니다. 그러니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그럼에도 복음의 실체이신 예수를 실제로 보고 함께 먹으며 만지는 복은 상상만 해도 떨리는 상황이긴 합니다(24, 요일 1:1). 그러나 주 예수께선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더 복되다 하셨습니다.


) [ 10:25-37]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그후 한 율법교사가 예수를 만나 시험하여 말했습니다(25). 그는 예수께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쭙습니다(25).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에게 율법에 어떻게 쓰여 있는지 반문하셨고, 그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26-27).

 

예수님은 그에게 그것을 행하면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28). 그런데 율법교사는 율법을 어떻게 행할지를 분명히 알지 못했으며 누가 참 사라의 대상인 이웃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길(30-37).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참 이웃에 대한 정의를 내려 주십니다. 현대 선진 사회는 이 원리를 채용해서 “선한 사마리아법”을 제정하기도 합니다. 위기에 처한 시민을 조치하지 않았을 때에는 위법한 것으로 평가하게 됩니다.

 

이 비유의 내용은 모두 아시다시피,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옷이 벗겨지고 폭행당해 거의 죽게 되었으니,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고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유대인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어 버려졌는데…… 이 사람을 제사장, 레위인은 보고서 개인사정을 앞세우며 그냥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에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갑니다. 그는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겼고, 가까운 주막 같은 곳으로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그 사람을 돌봐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비용이 더 들면 자기가 돌아오는 길에 갚아주겠노라고 약속까지 합니다(35).

 

이어 예수께서 율법교사에게 물었습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를 만난 자“에게 이웃이 되겠느냐?(36).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선한 이웃”이란 종교와 국가와 민족이 아니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선한 사마리아인을 본 받아야 합니다.

 

). [ 10:38-42] 마르다와 마리아의 교훈.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 마르다와 그녀의 여동생 마리아가 있었죠(38-39). 마리아는 주의 발 아래서 말씀을 들었고,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접대하는 준비에 분주했어요.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께 마리아를 일손을 보태도록 보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많은 일로 근심하지 않도록 권면하셨습니다(41-42). 일을 많이 하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감당할 만큼만 하는 것이거나, 예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마르다가 불평 없이 자기 일을 수행한다면 주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와 차이가 없긴 합니다. 그리고 혹 마리아가 주의 말씀을 들으며 우월의식이나 비교의식을 갖는다면, 마르다와 갖은 실수를 범한 것이 됩니다.

 

 많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한 두가지 일로 만족하면 자기의 평안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 하십니다(42).  마리아는 주의 말씀을 듣는 일, 한 가지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언니의 힘듦을 보면서도 부정하고 한 가지 듣는 일을 이루었어요. 마리아가 얻는 한 가지 일(주의 말씀을 들음)은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42).

결론)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일이요, 우리 주님이 부탁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인 복음을 전하는 일에 부담을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모양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복음을 기쁨으로 지혜롭게 항상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게 하옵소서-라고요. 또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이 있음을 기뻐하고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120523 안익선 목사/참조: 고경태 & 본헤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