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고라 자손의 마스길(시편 42 : 1 – 6)

호걸영웅 2024. 2. 23. 10:48

고라 자손의 마스길(시편 42 : 1  6)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이하 생략)

서론)

시편 42편은 ‘고라의 자손의 마스길이라는 주제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라고 했습니다. ‘마스길 ’은 히브리어로 ‘교훈 ’이란 뜻입니다. 본 시편은 총 11절로 되어 있습니다. 고라 자손은 모세를 대적하여 반역을 꾀한 무리의 자손입니다. 그들은 바로 모세가 누렸던 오랜 권력?에 대한 불신감과 권태감을 가지고 모세를 대적했는데……그것이 결국은 모세를 지도자로 세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가 되어 천벌을 받은 대표적 반역의 조상을 둔 후손들입니다. 그럼 시편 42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본론)

)첫째로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

 ‘고라’는 레위의 증손이며 이스할의 아들이며 모세와 아론의 사촌이라고 합니다. 결국 모세의 매우 가까운 친척입니다. 그런데 고라는 모세와 아론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고라가 오랜 광야 생활 중, 하루는 모세에게 대적하여 말하기를 ‘당신들은 분에 넘치는 일을 하도다. 온 회중이 다 거룩하고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는데, 어찌하여 당신들이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고 하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16:3)

 

그런데 모세와 아론에게 이스라엘 자손의 인도자와 대제사장 직을 맡겨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모세와 아론을 반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반역하는 일이 됩니다.  모세는 고라가 반역하는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반역하는 사람들을 나오게 하여 따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이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을 삼켜 산 채로 스올(음부,지옥)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는 말을 마치자마자…… 땅이 갈라지고 반역하는 그들과 그들의 집과 그들의 재산을 삼키고 땅이 그 위를 덮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반역에 동참한 250명을 불살랐습니다 (16:31-35). 그런데도 이튿날, 일부 회중이 감히 두려움도 없이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다’라고 하며 모세와 아론을 또 대적하여 공격하려 할 때, 구름이 회막을 덮었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면서 염병이 그들을 쳐서14,700명이 죽어버리고 맙니다.(16:49)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반역하는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되었기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죽게 된 무서운 사건을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고라와 고라의 협력자들이 이틀 사이에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를 받아 멸망하고야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의 죄로 자녀를 저주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고라와 함께 한 반역자들은 다 죽었지만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고라의 아들들이 죽지 않은 것은 아버지 고라와 같이 모세와 아론을 반역하지 않았음을 증거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음으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됨이냐’(18:2)라는 이스라엘의 속담을 말한 것처럼, 고라가 모세와 아론을 반역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고라의 아들들까지 죽이지는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고라의 아들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가 땅속에 묻힌 아버지와 여호와의 불이 나타나 반역의 무리들을 불살라 죽이는 장면을 보고 너무나 두려워 도망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낳은 자손들을 고라의 자손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행히도 훗날, 고라의 자손들은 성전의 찬양대가 되어, 여호와께 제사를 지낼 때, 은혜로운 찬양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섬겼습니다. 고로 시편엔 다윗의 시편이 제일 많고, 그 다음으로 고라 자손의 시편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부모의 죄로 인하여 자녀들을 벌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결국 자신의 믿음으로 자신이 구원받는 것처럼, 자신의 죄로 자신이 저주를 받습니다.  고로 조상 탓만 하며 인생을 불행 속에 살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조롱과 핍박과 박해를 받는 고라의 자손과 함께 하시고 도와주셨다.

고라 자손들은 조상의 죄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핍박과 박해로 많은 고난을 당해도 오히려 하나님을 더 잘 섬겼습니다. 본문에서, 고라의 자손들은 자신들의 삶을 ‘목마른 사슴’으로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1)라고 했어요.  그들이 ‘하나님이여 ’라고 하나님을 부른 것은 애끓는 탄식으로 하나님을 찾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땅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먼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 거주하였습니다(6). 만년설로 덮힌 2,850m의 높은 헤르몬산과 그 인근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미살(작다) 산은 작은 산입니다.

 

 그리고 만년설로 덮힌 헤르몬산에서 눈 녹은 물이 흘러내리는 시냇물이 ‘단’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요르’는 흐른다는 뜻으로 요단가의 상류인‘단’에서 하류지역인 갈릴리 호수로 흘러 가는 물이라는 의미로, 그 강물을 ‘요단강’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물론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까지 흐르는 강물도 요단강이라 하는데,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물 한 방울도 없는 유대 광야에서 목마른 사슴들이 물을 찾아서 이스라엘의 북부 끝의 헤르몬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을 찾아와서 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 고라의 자손들은 마치 자신들의 영혼의 갈급함을 사슴들에 비유하여 노래했습니다. 즉 여호와는 고라 자손을 돕는 생명수 물줄기가 되셨습니다.

  

) 고라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성전을 사랑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2)라며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라는 말은 하나님께 나아가서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시온의 성막(혹은 성전)에 임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뵙고 예배 드리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들을 멸시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고 조롱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들은 눈물이 음식이 되는 것처럼, 종일 슬퍼하며 여호와의 얼굴을 뵙고 섬기기를 더욱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다른 시편인 시편84:1, 10=고라의 자손들은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주의 궁전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날 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찬송했습니다

 지난 날 거룩한 절기와 예배의 날들을 지키며 다른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집에서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불렀던 것을 기억하며 그들은 마음이 상했습니다(4).‘마음이 상함’은 마음의 죄로 인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51:17)고 하며 동감을 표현했습니다.

 ‘상한 심령 ’은 죄를 슬퍼하며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마치 밀알이 부서져서 가루가 된 것같이, 마음이 낮아지고 깨어지고 부드러워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시고 기뻐하십니다.

 5절은 후렴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주를 기억하나이다”라고 찬송했습니다.

 

‘어찌하여’란 말은 ‘추스린다’는 뜻입니다. 적에게 쫓긴 병사들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

도 모르고, 사랑하는 부모 형제를 사모하며 눈물을 흘리며 낙심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복장을 추스르고 일어나, 적을 향해 싸우려고 달려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가?’라고 한 것은 자신이 낙심한 자신을 스스로 책망하고, 낙심한 자신의 영혼에게 다시 힘을 내  싸워 익자는 스스로에 명령입니다.

 

세상살이에 힘들고 지치고 어려운 여러분들이여! 우리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찬양함으로써 낙심하고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고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라고 하며 자신의 영혼을 추스르고 일깨워서 다시 일어서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실 당시엔 그 누구도 조롱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피한 고라의 자손들을 찾아와서 권면하고 위로해 주지 않았지만,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낙심 된 마음을 추스르고 일깨워서 믿음을 회복하였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느냐’는 말은 자신이 자신보고 책망하고 스스로 일깨워 일어날 때, 성령께서 그들을 도와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우리 예수께서는 중보하심으로 우리를 도와주시고 성령으로 도우십니다. 할렐루야!

 

*이제 두 번째 소절의 찬송시를 봅시다. (6-10)절입니다. 고라 자손들은 하나님을 찾는 애끓는 탄식으로 (6)=‘나의 하나님,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저 막연히‘하나님이여’라고 부르지 않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그들 자신이 친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찬송의 내용을 보면, 그동안 그들을 괴롭히는 존재가 사라지고 없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뼈를 찌르는 칼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기 때문에 원수의 압제로 슬프게 다니나이다’(9,10)라는 말씀을 보면, 전보다 더 많은 괴로움과 조롱을 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혼이 깨어남으로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의인은 칠전하더라도 팔기합니다)

 

(7)=“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낙심과 불안을 다 쓸어갔다는 말입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8)라고 합니다.  불안하고 두려운 일들이 더욱 많아질수록,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며 더욱 하나님께 찬송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낙심하고 불안해 하던 자신들을 일깨워 주셨던 하나님을 더욱 기억하였습니다(6). 

 

그리고 후렴으로 다시 자신들의 믿음을 추슬러 일깨우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11). 원수 마귀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에게서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낙심 되었던 믿음을 추스르고 다시 일깨워도, 원수는 떠나지 않고 우리 성도들을 더욱 괴롭히고 시험할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고로 우리 역시, 쉬지 말고 항상 모든 죄악에서 구원해 주시고, 끝까지 함께 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송을 불러야 함을 시편 42편은 가르쳐(마스길) 줍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조롱하고 핍박하는 사람들로 인해 낙심하고 불안해할 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셔서 도와주십니다. (예수께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소간 바를 믿으시길 바랍니다. )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 마귀를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둡시다. 주께서 나타나 도우심으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불안하고 힘든 상황을 만나셨습니까?

 

더욱 오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에게 외쳐 부르십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아멘

 

012324 안익선 목사/참조: 허창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