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흐느껴 우신 예수님(눅19:41~46)

호걸영웅 2024. 3. 30. 05:34

흐느껴 우신 예수님(19:41~46)

 

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45.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서론)

19장에서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자 예루살렘 성에 스스로 입성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기 전, 감람산 아래에서 성문 앞에 있는 기드론 계곡을 건너기 전에 두고 그 성을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그 성에 대하여 곧 닥쳐올 미래를 환상으로 보듯 보십니다. 장차 이방인의 군대에 의하여 그 성이 철저히 파괴되고 함락되며 숱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창칼에 죽어 나가는 참혹한 모습을 보십니다. 그리곤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우셨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흘리신 그 눈물과 그 흐느낌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본론)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사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눈물을 흘리시며 흐느껴 우신다는 것이 특이하게 보이는 장면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대체로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드러내는 행동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갓난아기는 엄마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웁니다. 어린이들은 견디기 힘든 상황이나 아픔을 호소하기 위해 웁니다. 청춘남녀들은 실연의 고통 때문에 잘 웁니다. 성인들은 여러 모양의 실패의 쓰라림 때문에 웁니다. 노인들은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의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 그 슬픔으로 인하여 울기도 합니다. 이 모든 눈물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연약한 인간들이 흘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시기보다는 울어야 할 이유를 그 놀라운 능력으로 제거하시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셨습니다. 그것도 심히 흐느끼며 우셨습니다.

도대체 왜 우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서들의 영혼을 불쌍하게 여겨 우셨습니다.

 심판에 놓여진 극렬한 고통에 놓일 영혼들을 슬퍼하시며 우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분은 놀라운 능력으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예루살렘 성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렇다해도 그들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번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1.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심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첫 번째 이야기는 요 113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를 보면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그래도 예수님 께서는 시간을 지체하신 뒤에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의 예표로 죽은 나사 로를 살리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뜻대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놀라온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시신은 썩어 냄새가 심하게 나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덤 안에 갇혀 있는 죽은 나사로를 행해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고요. 그러자 놀랍게도 수의에 쌓여 있던 나사로의 시신이 다시 살아서 성큼 성큼 걸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엄청나 게 놀랐습니다. 큰 슬픔에 눈물짓던 유족들과 친지들이 참으로 크게 기뻐 하나님을 친양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때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간단합니다. 죽음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하고 무섭고 힘든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 다. 우리가 병들 수밖에 없이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에 눈물 흘리셨고,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된 존재요, 연약한 존재요, 심판 받을 존재라는 사실에 눈물 흘리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사망을 이기고 죽음의 고통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시고자 예수는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2.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흐느껴 우시다

예수님께서 눈물 흘리며 우신 두 번째 이야기는 눅 1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4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고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때, 예수께선 새끼 나귀를 타시고 무리들의 환호 속에 감람산을 넘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기드론 계곡에 이르셔서 행진을 잠시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왜 우셨을까요?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예루살렘이 저렇게 아름답고 웅장하지만, 저들의 죄로 심판의 날이 다가와 그 성이 참혹하게 파괴되고 백성들이 창칼아래 피 흘리며 쓰러질 될 그 날을 미리 보셨기 때문에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십니다.

여기서 우셨다는 말은 ‘에클라우센’(Eklausen)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눈물을 주루륵 흘리며 우는 정도가 아니라 ‘갑자기 울음을 터트려 소리를 내어 통곡하는 행동’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야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고 기뻐하고 환호하며 떠들석하게 모여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길가에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입성하신다고 늘어서서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맞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성을 바로 앞에 두고 멈추시더니 갑자기 통곡하다시피 울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후에 제자들은 이 사건을 잊을 수가 없어서 복음서에 그것을 세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훗날 성도들은 그 자리에 눈물의 교회라는 교회를 지어 그 예수님의 사랑을 지금도 기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그로부터 약 37년 후인, 서기 70414일에 로마 군대는 장군 티투스를 지휘자로 삼아 예루살렘에 쳐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그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굶겨 죽이려는 의도로 토성(토둔)을 쌓기 시작했습 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사람을 포함해서 약 100만 명이 넘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안에 있었고, 포위가 계속되자 기근과 질병으로 죽어갔다 했습니다.

그래도 저항이 계속되자, 로마군은 곧이어 성을 쌓는 전문가들을 불러 성의 일부에서 네 개의 아랫돌을 빼내었고 그러자 그 성의 일부가 무너지게 됩니다. 그리곤 군대가 진입하여 예루살렘 성전 주변의 세 방향에 다시 성을 구축하고 성의 내부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전쟁으로 성벽엔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예루살렘 성전도 그 기초석만 덩그러니 남아 오늘날엔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런 심판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평화의 왕이시요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이 십자가에 달아 죽게 한 까닭입니다. 곧 평화의 왕을 거절하고 죽인 죄의 대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예루살렘에 오셔서 그들이 회개하도록, 그리고 예수께서 아들 하나님이심을 믿고 영접하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점점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길로 갔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다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죄를 자기들에게 돌리라고 외쳐댔습니다. 그러자 총독 빌라도조차 겁을 내어 이 일은 나와 상관없다며 세수대야를 가져오라 하여 그의 두 손을 씻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서기 7098일에 이스라엘은 온전히 로마의 손에 넘어가고 맙니다. 마사다의 요새에서도 결국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전사하거나 자살하고 맙니다. 그런 고통의 백성들을 보셨기에 예수께선 눈물을 흘리시고야 말았습니다.

예수를 거절한 백성의 최후가 이러했습니다. 오늘날 그 누구도 예수를 거절하고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처음 이 땅에 오신 예수는 구원을 위해 오셨으되, 나중에 오실 예수는 심판의 왕으로 오십니다. 죄 중에 그저 있는 저들은 결코 그 심판을 이길 수 없고 견딜 수도 없습니다.

 

3. 겟세마네에 흘리신 눈물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세번째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기도의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대표적으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말합니다. 26:37 이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자리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예수님께서는 왜 기도하면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일차적인 이유는 십자가를 지실 일에 대한 고통을 미리 아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는 피하고 싶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면 온 몸으로 겪으실 수 밖엔 없었기에 고민하셨고 힘드시고 슬픔에 사로잡히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온전한 육체와 영혼을 소유하셨기에 육체의 고통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로 우리의 육체에 고통을 능히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체휼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주님은 모르실꺼야내 아픔을 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결코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배고픔, 추움, 외로움, 슬픔, 기쁨을 다 아십니다. 고로 우리는 담대히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주님의 눈물은 죄의 삯으로 그런 고통이 왔음에 대한 상한 마음에서 흘리신 눈물입니다. 너무나도 그 고통이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서 오는 눈물입니다. 죄의 무게는 사실 우리 모든 인류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무겁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공격은 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참혹한 죽음의 십자가를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고로 예수님의 눈물은 바로 우리를 위한 눈물이 됩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너무나도 불쌍히 여기셔서 흘린 연민(Compassion)의 눈물인 것입니다.

 

인류이 조상 아담이 범죄한 후, 우리는 죄의 종들이 되었습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우리에게 왕 노릇했습니다. 노예가 사슬에 묶여 끌려가듯이 우리가 죄 사슬에 묶여 어쩔 수 없이  사망의 길로 끌려 갈 수밖에 없던 존재가 우리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해방시키시고자 예수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아담 한사람으로 죄가 들어왔듯이 예수 한 사람으로 죄를 몰아낸 것입니다. 고로 누구든지 이 예수를 믿고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받고 죄사함을 받으며 영생을 얻습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가 외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결론)

우리의 진정한 친구는 내가 슬플 때, 내 곁에서 나를 위해 함께 울어주고, 기쁠 땐 함께 손뼉 치며 즐거워해 주는 친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눈물을 흘리시고 흐느껴 우셨 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내어 놓으셨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중보하시고 성령으로 위로해 주십니다. 이 고마운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요 우리의 왕이십 니다.  지금도 예수는 우리를 도우시고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우리 역시 심판을 향해 달려가 는 죄인들을 위하여 우리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심령이어야만 합니다.

 

아울러,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러한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고 찬양하고 헌신하는 이 한 주간이 또 되시길, 예수님의 사랑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030424 안익선 목사/참조: 박봉수 목사 & 네이버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