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아낌없이 주신 예수(요15:11~15)

호걸영웅 2024. 3. 30. 05:39

아낌없이 주신 예수(15:11~15)

 

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서론)

우리에겐 여러 모양의 기쁨이 있습니다. "출생의 기쁨" "승진의 기쁨" "합격의 기쁨"
"
성탄의 기쁨" "부활의 기쁨"
추수의 기쁨 사랑의  기쁨 만남의 기쁨 등등 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아낌없이 주신 예수님의 기쁨에 대해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본론)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대해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울면서 기뻐한다든지.... 맞으면서 기뻐한다든지..., 핍박을 받는데 기뻐한다든지, 죽어가면서도 기뻐한다든지... 이런 것들 은 참으로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힘든 기쁨들인데..바로 이와 같은 상황속에서의 기쁨이 있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쉘 실버스타인(Shell Silverstein)이 지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Giving Tree,1964)란 이야기도 매우 유사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 내용은 이렇습니다.
『옛날에 한 그루의 커다란 사과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과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매일같이 그 나무에게로 가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한 잎 두 잎 주워 모았습니다. 그러고는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쓰고는 숲 속의 왕자처럼 흐뭇 해 했습니다. 때로는 그 나무의 줄기를 타고 올라가서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를 타고 사과 나무의 열매도 따먹곤 했습니다. 나무와 소년은 나름대로 숨바꼭질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피곤해지면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소년은 그 나무를 무척 사랑했고 나무는 나무대로 소년의 사랑을 받아서인지 무척이나 행복해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월은 흘렀습니다.
세월은 흘러 소년은.. 점점 나이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소년은 옛날의 소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무는 홀로 있을 때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소년이 모처럼 나무를 찾아갔을 때, 나무는 이렇게 말했습 니다. "얘야, 내 줄기를 타고 기어올라와서 가지에 매달려 놀아... 그네도 타고.. 열매도 따먹고.. 그늘에서 놀며 그렇게 즐겁게 지내렴..."
그러자 소년이 말하기를 "나는 이제 나무에 올라가 놀기에는 많이 커 버렸어. 이젠 어렸을 때완 좀 다르게 물건을 사면서 놀고 싶어. 그래서 돈이 좀 필요한데.. 나무야 나에게 돈 좀 줄 수 없겠니?" , 그러자 나무가 말하기를 "미안하지만, 내겐 돈이 없는걸... 하지만 내겐 나뭇잎과 사과는 있어.... 얘야, 내 사과를 따다가 도시에 갖다 팔지 그래? 그러면 돈이 생길것이고, 그러면 행복해지지 않겠니?...."
이 말을 들은 소년은... 나무 위로 올라가 사과를 한 아름 많이 많이 따 가지고는 가 버렸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소년이 모처럼 놀러 왔다가 같이 놀아주지 않고는 사과만 따 가지고 가버렸어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과를 따 가지고 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한동안 슬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소년이 나무에게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그때 나무는 기쁨이 넘쳐 몸을 흔들면서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내 줄기를 타고 기어올라와서 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타고 즐겁게 놀아..."

이제는 청년이 된 소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난 이제, 나무에 올라 그네 타고 놀 만큼 한가하질 않아. 앞으론 결혼도 해야하고, 아기도 가져야 하는데... 그래서 난 집을 먼저 준비해야 되. 나무야, 나에게 집을 좀 줄 수 없겠니?"
사과나무가 말합니다. "난 집을 가지고 있지 않는 걸..., 그렇구나! 넌 내 가지들을 잘라서 집을 지으면 되겠구나!"
그러자 소년은 그 나무의 가지들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자른 가지들을 집을 지으려고 가지고 갔습니다. 나무는 가지가 거의 다 잘렸지만...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한참 흘렀습니다. 어느 날 소년이 다시 나무에게 돌아왔을 때,
나무는 거의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너무 기뻐했습니다. "얘야, 오랜만이다! 어서 와! 나랑 같이 놀자!" 소년이 말합니다. "나는 놀기에는 너무 지쳤어! 이제 나에겐 배가 필요한데...나에게 배를 좀 줄 수 없겠니?" 그러자 나무는 "그래? 그럼 내 몸통 줄기를 잘라서 배를 만들어 보렴.그러면 너는 그 배를 타고 멀리 갈 수 있을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소년은 그 나무의 마지막 남은 줄기인 몸통을 싹둑 잘랐습니다. 그리고는 배를 만들어 타고 멀리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나
...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소년은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 다시 나무에게로 돌아왔 습니다. 그러자 나무는 "얘야, 미안하다. 이제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사과도 더는 없고...." 할아버지가 된 소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젠 치아가 몹시 나빠져서 이젠 사과도 잘 먹을 수 없어." 나무가 말하기를 "내게는 이제 가지도 없으니... 네가 그네를 탈 수도 없고... 어쩌지?" 소년이 답하기를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를 타기에는 난 이제.. 너무 늙고 힘이 없어..."
나무가 말합니다. "내게는 줄기마저 없으니... 네가 기어오를 수도 없고...", 소년이 말하기를 "나는 이제 기운도 없어서... 줄기에 기어오를 수도 없어..."
그러자 나무가 한숨을 쉬며 소년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미안해! 뭘 너에게 주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내게 남은 것이라곤 이제 아무 것도 없고..남은 것이란 늙어 버린 나무 밑둥 뿐이라서.. 미안하구나..."
소년이 말합니다. "그래? 괜챦아. 난 이제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저 조용히 앉아서 쉴 곳이나 있었으면 좋겠어. 난 지금 몹시 피곤하거든...."  그러자 나무가 말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 앉아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둥이 그만이지...이리로 와서 앉아 쉬어...."
할아버지가 된 소년은 나무가 시키는 대로 이제 마지막 남은 나무 밑둥에 걸터 앉아 편안히 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그의... 잎사귀들도 주고.. 열매도 주고.. 가지도 주고.. 줄기도 주고..
이제 마지막 남은 밑둥까지 다 주면서도 행복해 하며 기뻐하는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자기를 아낌없이 주면서도 행복해 하고.. 기뻐하신 분이 누구신가요?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이시며!!그렇게 자신을 내어 주기 위해
... 자진해서 십자가 고난 속에 기꺼이 걸어 들어가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주신 예수의 사랑
1.
만인(萬人)의 형제라고 하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esco D'Assisi)는 어느 날
사람에게 있어서 완전한 기쁨이란 무엇이며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레오(Reo)라는 형제(兄弟)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눕니다.
"
레오 형제, 어떤 형제가 학식이 있어.. 모르는 것이 없고
학문과 성경에 능통하고 마음 속의 비밀을 들추어 내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그래도 그에게 완전한 기쁨은 없는 거지요..." 레오 형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프란치스코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프란치 스코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레오 형제, 어떤 형제가 설교를 너무나 잘 하여 많은 사람들을 회심(悔心)시키고 또 악마도 좇아내며, 심지어 죽은지 나흘이나 된 사람도 살려낸다고 합시다. 그래도 거기에 완전한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때 레오 형제는 묻습니다. "아니 선생님, 그렇다면 완전한 기쁨이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
우리가 신발이 진흙과 먼지로 더럽혀 진 채로... 성전(聖殿)에 도착해서 성전 문을 두드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성전 문지기는 우리의 겉모습만 보고는 우리가 부랑자(浮 浪者)인줄 알고 성전 안으로 들여보지 않고 좇아 내어 눈과 추위에 버려뒀다고 합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화를 내지 않고.. 그 굴욕을 잘 받아들이고 문지기가 옳은 말 을 했다고 수긍하게 된다면... 레오 형제여...바로 거기에 완전한 기쁨이 있는 법이지요.

그리고 만일 우리가 추위를 이기지 못하여 계속 문을 두드리면서 문지기가 나와서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는데, 사람이 나오기는 나왔지만 몽둥이를 들고 나와 우리 옷을 붙잡고 는 눈 속에다 우리를 쳐박았다고 합시다. 그래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受難)을 생각하며 그 곤욕을 잘 참고 견딘다거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잘 참고 받아 들인다면
……레오 형제여.. 바로 거기에 완전한 기쁨이 있는 법이지요" (Francesco D'Assisiby Cirillo Tescaroli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을 잘 참는 경지에 이르는 일은 참으로 완전한 기쁨을 소유할 수 있는 경지라는 의미인듯 합니다.

2.
부활절을 앞 둔 40일간인 사순절 기간의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그리고 가시 면류관입니다. 좀더 분명하게 말하면 수난(受難)과 고통(苦痛)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순절을 어둡게 생각하고 우울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사순절의 본질이나 그 핵심은 어두운 것도 아니고 우울한 것도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간 동안의 슬픔과 고난은 참으로 놀라운 구원과 부활의 기쁨을 낳는 잉태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11절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 이니라"(요한복음 15:11)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을 앞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려고 전진하는 가운데 있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주신 말씀들이 이러합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한복음 13:7)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한복음 13:14-15)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
요한복음 13:34-35)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한복음 15:8)
이렇게 쭉...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고 나서 주신 말씀이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신학자(神學者) 마릴린 거스틴(Marilyn J. Gustin)은 그의 저서 『사순절의 기쁨』

(Choosing Joy for Lent)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온 인류의 죄를 위하여 죽으려 하면서도.. 기뻐했으며,그래서 그분 만이 모든 사람에게 참 기쁨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기쁨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원래 기쁨이라는 속성(屬性)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기쁨을 도저히 만들 수 없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다만 그 기쁨을 받아들일 준비만 하면 되는데, 그 준비란 그리스도를 향하여 마음을 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중략) 참된 평강도 그러하다..

예화)한 수도사가 나무 아래 앉아 있는데 한 사람이 담요를 갖다 놓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수도사는 머리를 끄떡이며 빙그레 웃었다. 수도사가 이제 그 담요를 집어 막 어깨에 두르 려 하는데 한 거지가 와서 그 담요를 잽싸게 채 가지고 갔다. 수도사는 그래도 빙그레 웃었다. 또 한번은 한 여인이 음식을 갖다 놓고 가는 걸 보고 머리를 끄덕이며 감사기도 를 드리고 있는데 다른 거지가 와서 홀딱 가져가 버렸다. 수도사는 머리를 끄덕이며 그래도 빙그레 웃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왔다가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살이의 본질이죠. 사람들은 무엇이든 움켜 쥐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참 만족도 참 기쁨도 없습니다. 참 만족과 참 기쁨이란 움켜 쥐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 만족과 참 기쁨 참 평강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요? 물론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얻을 수 있고.. 들어 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이지만..일단 이것을 바라야 하고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을 기도(祈禱)라고 합니다.

 

이 수도사의 이야기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완전한 기쁨을 깨닫게 하는 길이라는 의미의 예화일 것입니다.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찬송가 359= 『예수가 함께 계시 니』란 찬송 가사 1절에 보면, 예수님이 누구신가? 바로 기쁨의 근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라고 했습니다. 생명조차도 아끼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그 기쁨의 모습을 우리는 날마다 배우고 닮아가야 합니다.
원래 3, 4월은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묵상하는 달입니다. 우리 모두의 죄를 대속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을 더욱 깊이 생각하며, 우리 모두의 믿음이 더욱 성숙해져 가고 변화되어 가는 3월과 4월이 되시길 바랍니다.

 

031224 안익선 목사/ 참조: 허호익 님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