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누가복음 20장 강해(성전에서의 논쟁과 교훈들)

호걸영웅 2024. 3. 30. 05:43

누가복음 20장 강해(성전에서의 논쟁과 교훈들)

 

서론)

오늘 눅 20장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 여러 사람들과 신앙적 논쟁, 혹은 의견 교환? 등이 기록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크게 두 대지로 나눕니다. 1) 1-19: 예수께서 받은 권한의 근거와 포도원 심판의 비유, 2) 20-47: 세금과 부활 후 있을 상황에 대한 교훈-등등입니다.

본론)

) 1-19: 예수께서 받은 권한의 근거와 포도원 심판의 비유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장로들과 함께”(1) 예수께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2)라고 묻습니다. 성전에서 예수께서 하신 행동과 말씀들은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신앙의 뿌리를 흔드는 것이었음을 그들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침례 요한의 침례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물으십니다(3-4).

침례 요한이 하나님이 보낸 사람인지 아닌지 등에 대해 대답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답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답하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고,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그를 존경하고 있던 무리로부터 원성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5-6).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잘 모른다고 답했고, 예수님도 답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7-8). 그들은 이미 마음을 정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에게서 권한을 받았다고 말해도 듣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둘러서 있던 무리에게 비유를 하나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멀리 떠났습니다(9). (포도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고,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고, 농부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을 은유합니다.)

 때가 되어 소작료를 받으려고 종을 보냈는데, 농부들은 그를 때려 빈손으로 돌려보냅니다(10). 소작료는 선민들이 맺어야 할 열매를 뜻합니다. 보냄 받은 종은 예언자를 의미합니다.) 주인은 거듭 종을 보내지만 농부들의 태도는 바뀌지 않습니다(11-12). (예언자들은 하나같이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배척과 박해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자기의 아들을 보냅니다(13). 아들에 대해서는 다른 대접을 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만, 농부들은 포도원을 영원히 차지할 욕심으로 그 아들을 포도원 바깥으로 내쫓아 죽입니다(14-15). (예수님은 당신이 예언자들의 전통에 서 있다는 사실과 당신이 죽임 당할 미래를 예고하십니다.)

이 비유 끝에 예수님은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15)고 물으십니다. 그러면서 “주인은 와서 그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16)라고 덧붙이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선민의 자격이 박탈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16)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시편 118 22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 일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정해진 일이라고 답하십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듯”,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거부 당하고 죽임 당하겠지만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세우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누구든지 그 돌 위에 떨어지면, 그는 부스러질 것이요, 그 돌이 어느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 것”(18)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대제사장들은 자신들을 두고 한 비유인 줄 알고 예수님을 잡으려 했지만 백성이 두려워 손을 대지 못합니다(19).

예수를 대적하는 자들은 결국 산산히 부서져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 20-47: 세금과 부활 후 있을 상황에 대한 교훈

당시 유대 자치 의회인 산헤드린에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허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은 로마 총독에게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첩자를 들여보냅니다(20).

그들은 예수님을 옭아 매고자, 말할 기회를 틈타서 먼저 아부를 한 다음(21)…… “우리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22)라고 여쭙니다. 이것은 아주 난처한 질문입니다.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 황실에 반항하는 정치범이 되는 것이고, 바치라고 하면 유대인들에게 매국노로 몰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데나리온 동전을 보여 달라고 하시면서, 거기에 새겨진 형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십니다(24).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라고 답하자, 예수님은 “그러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25)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겉으로는 황제에게 세금을 내라는 뜻으로 들리지만, 유대인들은 속뜻이 다르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사고 방식에 따르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황제 조차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파 놓은 함정을 피하시면서 진리를 설파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네이버 주석을 참고하여 좀 더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참고:네이버 주석=(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주님의 비유<포도원의 심판 비유 9~19> 의 말씀이 자신들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했지만,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총독의 힘을 빌어서 주님을 잡고자 하여, 주님께 정탐꾼을 보내었죠. 그들은 정탐꾼들로 하여금 함정을 파놓게 하여 주님께서 그 함정에 빠지도록 했어요.

정탐꾼들은 주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하여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 이까 불가하나이까(20:22)”라고 물었습니다. 만일 주님이 이 물음에 대하여 “옳지 않 다 ”라고 대답한다면 로마에 반역하는 것이 되어 총독으로부터 체포될 것이고, 납세가 “옳다”라 고 대답한다면, 자신들을 식민지로 삼은 로마를 지지하는 말이 되어 유대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민족의 반역자로 비난을 받게 될 것이었죠. 그러므로 주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실지라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간계(奸計)를 아시고 그들 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도록 명하셨고, 그 화폐를 보이시며 그 화폐에 누구의 형상 (形象)과 글이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을 때, 주님을 그들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사람들이 화폐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생각을 알아야 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화폐는 권력의 상징이었 습니다. 그래서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했을 때, 무엇보다 먼저 한 일은 정복국가의 왕의 얼굴을 새겨 넣은 화폐를 발행하는 일이었지요. 이렇게 한 것은 화폐에 새겨진 왕은 그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지역이 어느 왕의 지배 아래 있는지 그리고 그 지역에서 왕의 주권이 잘 유지되고 있는지 살펴보려면 그 지역에서 사용되는 화폐와 그 화폐의 통화 상태를 보면 알 수 있었습니다(바클레이, 마가복음 주석 참조).

그러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는 말은 세상에 속한 것은 세상에 돌려주라는 의미입니다. 디모데후서3장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 돈을 사랑하는 것, 교만한 것, 감사하지 않는 것,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는 것 등은 세상에 속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고, 갈라디아서 5장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 투기, 술취함, 방탕 역시 세상에 속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죠.

즉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세상의 얼굴과 세상의 이름이 새겨진 것은 모두 세상 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세상에 돌려줌으로써 경건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세상의 것을 세상에 돌려주는 것일까요?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세상의 것을 세상에 돌려준다는 것은 세상에 속한 것들과 관계를 끊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것과 관계를 끊지(분리되지) 않고는 우리가 영적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죠. 따라서 우리의 영적 성장의 정도는 세상에 속한 것들과 관계를 끊고 사는 정도에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님의 모습과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것들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을 의미해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전10:31)”인생의 존재 목적에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일이 됩니다.

 

 또한 사랑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것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죠.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고 했어요.

 

 경건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일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죠. 베드로는 우리에게 경건의 삶을 위하여 항상 힘쓸 것을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5-7)”고요.

 

 이처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의 경건한 삶을 위하여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보낸 정탐꾼들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주 예수님의 말씀에서 책잡을 일을 발견하지 못하고, 다만 그의 지혜로우심에 대하여 놀라며 잠잠할 뿐이었다고 했습니다. 주 예수님은 지혜의 원천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어떤 간계(奸計)도 주님을 넘어뜨리지는 못하죠. 따라서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게 사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할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28절부터는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개파 사람 몇이 찾아와 질문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부활을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이 있다면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설정해 질문을 합니다(28-33).

사실 이것은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바리새파 사람들과 논쟁할 때 자주 사용하던 예화의 경우였다고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부활의 차원에서의 삶이 이 세상 차원에서의 삶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먼저 언급하십니다(34-35).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상황을 대입하여 생각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라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부활은 육신의 생명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36-38). “모든 사람(성도는)은 하나님과의 (바른)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38)는 말씀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 있을 때 진실로 (영원히)살아 있는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대답을 듣고 율법학자 가운데 몇 사람이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39)라고 응답합니다. 자신들을 대신하여 부활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해 주신 것이 그들에게는 큰 기쁨이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그 자손 예수님은 다윗보다는 열등하다는 의미의 생각을 하는 율법학자들에게 이의를 제기하십니다. 예수께서 혈통으로 하면 다윗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근본 신분에 있어서는 다윗이 나의 주님이라고 불렀던 분이 곧 예수님이시므로 다윗보다 예수께서 응당 월등하신 아들 하나님임 증거한 내용이 됩니다(41-44).

또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서기관들의 위선과 권위 의식과 숨겨진 탐욕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45-47).

결론)

오늘 기억할 한 말씀은 무엇입니까? 가이사의 것과 반대되는 하나님 것인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 드릴 것들을 잘 드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전도와 선교를 위해 우리 재물과 건강과 재능과 힘을 드리고, 경건한 삶을 하나님께 또한 드리길 힘써야 합니다. 이런 부분을 열심히 잘 실천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늘 점검해야 합니다.

030224 안익선 목사/ 참조: Godmade & good news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