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참으로 자유로운 삶의 비결 (요한복음 8:31~36)

호걸영웅 2024. 7. 18. 01:52

참으로 자유로운 삶의 비결 (요한복음 8:31~36)

 

  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1.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서론)

어느 법정에서 판사가 어느 피고에게 이런 판결을 했답니다. “피고는 23개의 소송 사건에 유죄임을 판정합니다. 따라서 피고에게 총 175년 징역을 선고합니다.
죄수는 노인이었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판사의 표정이 부드러워졌습니다.
“당신을 엄하게 다스리려는 건 아닙니다. 내가 부과한 형이 매우 가혹한 형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175년을 다 살 필요는 없습니다.” 죄수의 눈이 희망으로 빛났습니다. 곧 풀려날 것을 기대했습니다. 판사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복역할 수 있는 만큼만 하십시오!

결국 이 말은 죽으면 그날로 복역이 끝난다는 의미입니다. 판사가 자유를 제법 주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하루도 자유를 주고 있지 않은 판결을 내린 판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판사는 좋은 판사일까요, 나쁜 판사일까요? 확실한 것 하나는 분명히 이 판사는 법을 잘 지킨 판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사실 법정에 가면 정의의 여신 조각사이 있답니다. 그런데 그 여신상의 눈이 가리워져 있데 요. 눈이 가려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선입견을 갖고 보지 않고 공평하게 판단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받아야 할 벌은 정당하게 받도록 판결하는 판사가 좋은 판사라 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판사가 되신다면 예수님은 과연 좋은 판사일까요? 나쁜 판사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살펴 보겠습니다.)

 

본론)

)진리를 통한 예수님의 도전

오늘 본문 말씀에는 매우 놀라운 나옵니다.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하나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무작정 자유를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자유를 선포한다면 그것은 좋은 판사가 아닙니다. 주님은 자유를 선포하되 조건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


주님은 진리를 아는 자들에게만 자유를 선포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진리를 알수 있을까요?

사실 이 진리라는 단어를 가지고 많은 대학교들이 각 학교의 표어를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하바드 대학교는 ‘진리,’ 예일 대학교는 ‘빛과 진리,’ 한국의 서강대학교는 ‘진리에 복종하라’, 연세대학교는 오늘 말씀 그대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 라.’고 했습니다. 물론 대학교는 나름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학교에 들어 가려면 많은 노력과 입학금이나 등록금 등의 엄청난 경비가 들어 가야 합니다. 대학교를 통해 진리를 알게 되어 자유를 누리는 것은 ㅗㅂ통사람들에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와 자유는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요? 31=“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라고 하십니다.


진리를 알아 자유를 얻는 길이 너무나 간단해 보입니다. 그 길의 시작은 곧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입니다. 진리를 아는 길은 하나면 족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제자가 되고 진리를 배워 알게 되는데, 바로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말씀을 듣는 자들은 반응이 33절에 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라며 그들이 발끈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왜 발끈해 하며 화를 냈을까요? 한 마디로 이들은 ‘자유’의 뜻을 단순히 유대인적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당시는 유대인들은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거의 2분법이었습니다. 남자냐, 여자냐? 헬라인이냐, 유대인이냐? 자유인이냐, 종이냐?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보면,  어떤 랍비는 매일 세 가지 감사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나를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으로, 여자가 아닌 남자로, 종이 아닌 자유 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사실 그 날 아침도 많은 유대인들이 이 세 가지 감사 기도를 드리고 하루를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그동안 예수님께 호의를 가졌던 유대인라 할지라도 돌연 예수께 발끈하며 대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들의 이 모든 상황을 모르실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차분히 답하십니다.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매여서 살고 있는 죄의 종을 뜻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이들은 ‘종이 주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가지의 불가능함 중에 한가지의 희망.

잠시 다음의 세 가지를 다시 살펴보면 본문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여자가 남자가 될 수 없습니다. 2)이방인이 유대인이 될 수 없습니다. 3)종이 자유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세 가지는 주로 부모님으로부터 아예 가지고 태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오죽이면 아침마다 드리는 감사 제목으로 종이 아니고 자유인으로 태어나게 해 주신 것을 감사했겠 습니까? 그러던 갑자기 자기들을 ‘죄의 종이라 했을 때…… 기분이 어떠했을까요?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또 하나가 있었을 겁니다. 여자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는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가 될 수 없고 이방인이 유대인이 될 수는 없지만 종은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인이 풀어주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것도 너무나 잘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이 말씀은 절망적인 것 같지만 희망도 담겨 있습니다. ‘죄의 종은 바로 예수님 안에서는 희망적 상황이 될 수 있었습니다. ? 누군가가 해방시켜 주면 되니까요.

 

예화) 또 다시 법정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어떤 식당 주인이 닭고기 요리에다 말고기를 섞어 팔고 있다는 죄로 붙잡혀서 법정에 끌려 갔답니다. 닭고기 요리라고 해 놓고는 거의 말고기로 음식을 요리를 한 것입니다. 선고에 앞서 재판관은 그가 어떤 비율로 닭고기에다 말고기를 섞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식당 주인 은 선서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50 50으로 섞었습니다. 재판장님.……
그래서  풀려났습니다. 재판관은 닭고기 반에다가 말고기 반을 섞었으면 그래도 봐 줄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재판이 끝난 다음에 한 친구가 ‘50 50’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를 물었습니다. 주인이 대답합니다. “말 한 마리에 닭 한 마리.
곧 닭고기 소량에다가 말고기를 다량 섞은 요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50 50이라는 말에 재판관도 속은 것입니다. 이 식당 주인은 죄의 종이 된 전형적인 사람입니다. 끝까지 재판관도 속였습니다. 이 식당 주인은 계속 이렇게 잘 살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봤자

 그는 늘 남을 속이면서 죄의 종일뿐입니다.  그는 죄의 올무에서 해방될 순 없습니다.

 

)예수 안에 거하라

 그러나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희망은 있습니다.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 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라고 했어요.

예수께서 풀어줄 그 누구를 생각지 않고 죄의 종에 대한 말씀을 하셨을 리는 없습니다. 주님은 죄의 종 된 자들을 풀어줄 자를 소개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풀어줄 것을 은연 중 실마리는 주시는 것입니다. 다음 36절로 이를 분명히 드러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여기서 32절과 36절을 연결시키면 아주 쉽게 답을 얻게 됩니다. 32절에서 “진리가 너희 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하고, 36절에서는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 로 자유로우리라” 말씀하십니다. 즉 아들이 곧 진리입니다. 아들이 죄에서 자유롭게 하는 진리이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이라구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입니다.

 

어떤 신학에 관계된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독일어로 ‘듣다’는 ‘속하다’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곧 들음으로써 속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침에는 주로 조용한 피아노 곡을 듣습니다. 그는 아침에는 클래식 세계에 속합니다. 그는 또 오후에는 팝송을 듣곤 합니다. 결국 그는 두 음악의 그룹에 속해 있는 셈입니다. 음악적으로 말한다면….
물론 예외적 경우도 있겠지만, 계속 듣는다는 것은 어디엔가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말에 거하면’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아마 주님은 듣는 것은 곧 속하는 것임을 의미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거하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 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 예수님께 속하는 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주님께 속한 자가 된다는 것은 또한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가 될 때 비로소 진리를 알게 되고, 결국 이 진리가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말은 과거형이 아니고 현재형이라고 해요. 계속 진행형 입니다. 곧 말씀을 한 번 듣는다고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을 때 어떻게 듣습니까? 제목과 더불어 첫 마디만 듣는다고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은 것입니까? 계속 끝까지 들어야 합니다. 그 때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은 것입니다. 잠시 모짜르트의 음악에 속하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도 진행형입니다. 말씀을 끝까지 계속 들을 때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됩니다.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한편 자유함을 누리는 것도 진행형인 것입니다. 우리는 늘 말씀 안에 거해야 우리는 늘 자유함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유함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자유로우려면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든 예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든지 설교를 듣던지 강연에 참여하든지 방송을 듣던지……, 성경의 말씀은 결코 혼자만 읽어서는 온전히 이해를 할 수 없는 부분도 있기에,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서 부지런히 읽혀지고 가르쳐 져야 합니다. 결코 이런 일에 참여하기를 게을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고로 예수님은 12제자를 세우시고 그들이 교회를 세워 나가도록 하셨습 니다. 12제자 외에도 수백명의 제자들을 최선을 다해 가르치셨습니다.

 

결론)
아까 제가 말씀드린 식당 주인의 이야기를 보면
…… 우리도 숫자로 장난을 치면서 아주 자유 롭게 사는 것 같이 살 수도 있어요. 아주 재미있게 잘 사는 것 같습니다. 죄의 종 된 분들도 나름 죄 짓는 재미로 삽니다. 때론 엄청 고소해요. 그러나 죄에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해요. 죄의 결국은 사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그 심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한 밭에 나서 자라지만…… 결국 가라지는 베어져 불태워져 버립니다. 참으로 자유 로 삶과는 비교가 안됩니다. 그럼, 왜 우린 예수로 인하여 자유로울 수 있나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 대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외에는 우리 죄를 없앨 분은 세상에 더는 없으신 까닭입니다. (성경대로 오시고 사시고 죽으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

 

J.I. Packer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역사 가운데 큰 자취를 남긴 131명의 유명한 기독교인 들을 소개하는 책을 펴 냈습니다. 다음과 같이 131명을 소개합니다. “역사는 날짜도 통계 도 사회 운동도 아니다. 역사는 사람이다. 멋진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131명을 한 사람 씩 소개합니다. 신학자, 목회자, 선교사뿐 아니라, 예술가, 문학가, 정치가, 학자 등을 소개 합니다. 이들 모두 역사 속에서 빛이 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빛이 될 수 있었던 이유 를 설명합니다. 그들이“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말씀에 속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선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070924 안익선 목사/ 참조: 보스톤 한인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