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살라(전 3:11-14)

호걸영웅 2025. 1. 16. 05:47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살라( 3:11-14)

 

11.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12.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13.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14.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서론)
이 세상에는 수많은 난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즉 우리들에겐 인간으로서는 스스로는 풀 수 없는 매우 어렵고 수많은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죠.

모든 인생은 태어나기 전부터 살기 위해 싸워야 하고(야곱과 에서가 복중에서 싸웠다), 많은 고생을 겪어야 하고, 많은 질고도 당하고, 자식을 키우느라 많은 수고를 하다가 이제 좀 쉬어야지 하면 어느새 늙어 있고, 그러다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후세 사람들은 그런 나를 기억도 해주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산다는 것인가 하는 후회나 절망이 생기기도 합니다.


, 왜 어떤 이는 100세까지 사는데, 나는 이 젊은 나이에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경우도 있고, 남은 다 손쉽게, 혹은 고생한 대가로 다 성공하여 잘 사는데, 나는 이 놈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늘도 이렇게 어렵게 살아가야 하는가? 남은 다 어려운 일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토록 고통스런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아픔을 갖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난제를 바라보는 두가지 시야가 있습니다.


본론)
)인간사를 바라보는 두가지 견해

먼저 ① 운명론(運命論, fatalism)입니다.

운명론은 다른 말로 숙명론(宿命論)이라고도 합니다. 운명론을 잘 말해주는 시를 하나 소개해보면…… 존 드라이언(John Dryden)의 시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라도 태어났다 죽으니,/아무도 정말 놀라운 행복이란 알 수 없어라/ 어떤 일에도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고 참고 나가세/우리가 염려해도 되지 않는 일 가지고/지나치게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마세/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나가는/순례자처럼 나갈 뿐일세/ 세상은 여인숙./죽음은 그 여정의 끝이어라 』라는 시입니다.

여기서 무슨 어려운 일이 찾아온다 해도 한결같은 마음/ 곧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참고 나가세. 우리가 염려해도 되지 않는 일 가지고/ 지나치게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마세 라는 싯귀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 싯귀 속에 나타난 사상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명이 있고 모든 일은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데 그것을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당할 수밖에 없으니 무슨 일이든 운명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죠.

 

 "슬퍼한다고 되는가? 어쩔 수 없네.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슬퍼도 참게나. 인생이란 게 다 그런 거야!"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운명론이요 숙명론이다. 그런데 이 자세는 매우 소극적입니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 그저 견디어 내려고 애를 쓸 뿐입니다. 괴로운 일을 당했을 때 그저 잊어버리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목적지도 없는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노래방으로 가서 목이 터져라 한 많은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자기 인생을 슬퍼만 하기도 합니다.

 

또 시인은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나가는 순례자처럼 나갈 뿐일세. 죽음은 그 여정의 끝이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가 당할 수밖에 없는 그 정해진 운명을 향해 계속 참고 나아가지만 그 끝은 죽음이요 더 이상 소망도 없다는 것입니다.  삶의 가치나 기쁨이 없는 허무주의가 됩니다.

 

②섭리론(Providential theory)

인간사의 난제를 바라보는 또 다른 모습은 섭리론(攝理論)입니다. 이것은 모든 만물에는 그것들을 지으신 분이 있고 주인이 계시다는 것이죠. 모든 만사에는 창조자와 운행자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즉 만사에 원인자가 있고 성취자가 있습니다. 어느 하나의 조그마한 일도 결코 그 지배자의 의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견해입니다. 그 지배자란 바로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섭리론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고유한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바로 섭리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11절에서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모든 것이나 일이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1966 10 21일 아침 9 15, 이제 막 1교시 수업이 무르익어 가고 있는데, 사우드 웨일즈 탄광으로부터 석탄 폐기물 더미가 고요에 잠긴 탄광촌 아버팬으로 내리 덮쳤습니다. 그 날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참사는 초등학교에서 일어났습니다. 새까만 진흙으로 변한 석탄 찌꺼기가 구릉을 타고 흘러내려 교실을 덮쳤는데, 피할 사이도 없이 5명의 교사와 109명의 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때 한 BBC 방송기자의 인터뷰에 응한 한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실수하신 일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라고요.

그런데 중요한 점 하나는, 이런 일이 왜 발생했는가 입니다. 인간들이 잘 이해 못한 자연 법칙을 무시한 탓이기도 합니다. 위험한 곳에 학교를 지었다는 점 일수 있습니다. 또는 환경오염으로 재난이 발생 했을 수도 있습니다. 운명이라기 보다는 자연적 혹은 과학적 위반 요소 때문에 재난을 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을 떠난 삶이 허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솔로몬은 앞에서 네 가지 허무의 실례를 말했었다. 1:12-18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지혜와 지식은 인간사의 여러 불합리한 일을 결코 해결하지 못하니 그 지혜와 지식은 헛되다고 했다. 2:1-11에서는 육체적 쾌락을 채우기 위해 갖은 일을 다 해보았으나 지속적 쾌락은 누릴 수 없으니 헛되다고 했어요. 2:12-17에서는 죽음 앞에서 인간은 공평하니 살아있는 동안에 지혜자니 부자니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2:18-23에서는 사람이 수없이 수고하여 재물이나 명예나 부강한 나라를 이루어 놓지만 결국 얼마가지 못해 죽어야 하고, 죽는 순간 그 모든 것을 뒤에 누가 취할지 모르지만 그냥 다 놔두고 빈손으로 가야 하니 허무하다고 했었다.


솔로몬은 그렇게 허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본문 9-10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든 때를 주장하시고, 모든 기회를 섭리하고 계시는데,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 스스로 무슨 행복을 얻을 수 있겠으며, 무슨 유익을 얻겠느냐고 했습니.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서 인간 스스로 수고하고 애쓴 그 열매는 결국 허무뿐이라는 것이죠.
그런데도 인간이 만사를 절대적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떠나 인간사의 불합리한 일들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니 그것이 해결되겠느냐는 것입니다.

 

(12:20)=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시는 분 앞에서, 그 분의 뜻과 계획을 벗어나 수고해 본들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인생들은 모든 때와 기회를 주장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흥하라고 했습니다.


) 허무한 삶을 극복하는 비결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본문 11-15절에서 솔로몬은 이 모든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적극적인 비결을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허무가 없는 복된한 인생을 살려면 인간은 이제 "해 아래"를 바라보고 살던 그 눈을 들어 "해 위"를 바라보고 살ㄹ 하십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기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 위, 곧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참 기쁨을 얻게 된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고,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겠다고 발버둥쳐 봐야 나의 무능함과 연약함만을 깨닫게 될 뿐입니다.


,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어떤 은총을 주시는가를 살펴보도록 합니다. 11절 상반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라고 하십니다. 만사가 하나님의 때가 되야 아름답게 된다는 것이죠.


이런 시가 있습니다. 『나는 주님께 아름다운 꽃을 구했으나/ 주님은 가시가 돋친 선인장을 주셨네./나는 주님께 나비 떼를 구했으나/ 주님은 무서운 벌레 떼 내게 주셨다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네. 무서워 떨었네./절망 속에 홀로 눈물 흘렸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보았네./ 그 황홀한 꽃 선인장에서/무서운 벌레 나비 되어 날으네./오 놀라워라 주의 인도하심이여!』라는 시입니다.

시인은 주님께 아름다운 꽃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응답으로 가시가 돋친 선인장을 주셨죠. 시인은 주님께 나비 떼를 구했으나 주님은 무서운 벌레 떼를 그에게 주셨어요. 우리가 이런 일을 맞이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 하나님께 구하기를 아름다운 인생, 복된 인생, 행복한 인생만을 구했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가시가 돋친 선인장을 주셨다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인생, 참기 어려운 일들을 허락하셨어요.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하나님의 그 섭리를 금방 이해하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의 마음은 혼란스러워지고 절망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원망도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그때는 이해 못하였었는데, 어느 날 보니, 그 선인장 가시 가운데에서 황홀한 꽃이 피는 것입니다. 그렇게 쓰디쓴 고난을 통해 황홀한 인생의 기쁨을 허락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어요. 무서운 벌레 떼를 주실 때 원망과 불평도 했는데, 웬걸요. 지나고 나서 보니 그게 나비 떼가 되어 날아오릅니다. 그 무서운 이전의 사건들, 나를 절망케 하던 그 일들이 이제는 아름다운 나비와 같은 황홀하고 좋은 일들로 변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비로소 만사를 아름답게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그와 같은 섭리에 우리는 모든 것을 맡기고 결국에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믿고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살아가야 우리에 마땅한 본문입니다(14).


그리고 11절은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 영원한 시간은 반드시 존재했고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를 떠나면 아무리 발버둥친다 하더라도 결코 영원을 사모하는 그 마음을 가득히 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지 않고 살아가면 결국 남는 것은 허무뿐인 것입니다. 중국의 진시황을 보세요. 영생하는 불로초를 얻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천지사방으로 파송해 보내고 온갖 애를 다 써봤지만결국 수은에 중독되고 죽고 말았어요.


그러면, 영원을 사모하는 그 마음은 어떻게 채우고 얻을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대속의 주님, 내 죄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주님, 아들 하나님으로 믿으면! 영생을 얻고, 뻥 뚫린 것만 같은 나의 마음에 천국이 충만하게 임하고, 예수님 한 분만으로도 만족하는 삶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발견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갈 때, 영원을 사모하는 그 마음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우리의 마음이 충분하게 채워지고 넘쳐 흐르게 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결론)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역행하려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것 이상을 탐내며, 억지로 내 것이 되게 하지 말고, 또 주어진 분수를 넘어서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뜻이라면, 내가 그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갈 때, 가장 기쁨이 넘치고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뜻으로 겸손히 순종하고 하늘의 소망을 품고 겸손히 기도하며 살아가는 삶에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있음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올해도 모든 허무한 삶의 부분들을 잘 극복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범사에 감사하며 가장 행복한 사람들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122424 안익선 목사/참조: 조달용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