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17-24)

호걸영웅 2025. 1. 16. 06:14

새 사람을 입으라 ( 4:17-24)

  1.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2.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3.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4.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서론)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켰답니다. "목욕탕에 가서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보고 오너라."라고 하면서 말이죠. 아들이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런데 목욕탕 앞 땅바닥에 끝이 뾰족한 돌멩이 하나가 박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오면서 모두 그 돌에 걸려 넘어질 뻔하고, 어떤 사람은 넘어져 무릎을 다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돌에 대고 욕을 하면서도 누구 하나 그 돌을 치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후로도 스무 명이 넘게 지나갔고 계속해서 사람들이 넘어져 다치면서 욕을 하고는 가버립니다. 얼마 후 누군가 다시 또 지나갔고 그 사람도 역시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일어나더니“웬 돌이 이런 곳에 박혀 있나? 사람들이 다치겠구나.”하면서 그 사람은 그 돌을 빼냈습니다.

 

그 아들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지금 목욕탕에는 한 사람밖에 없던데요.”라고요. 그러자  아버지는  "잘됐구나, 지금 목욕이나 가자." 라고 하며 아들과 함께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런데 목욕탕 안에는 사람들로 북적대어 발 디딜 틈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야, 이 녀석아! 이게 한 명이냐?" 며 화를 내셨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돌을 치우고 들어 간 그 사람만을 가리키면서 대답을 합니다. “아니에요, 아버지, 사람다운 사람은 오직 저 한 사람뿐이었어요.”라고 했답니다.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싫어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쉽게 고치거나 바꾸려고 하지 않는 묘한 심리들이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 용어 중에 <고착상태>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종래의 유치한 습관, 혹은 부정적인 습관을 버리지 않고 계속 유지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고 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런 고착상태에 빠진 사람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변화되지 않은 낡은 것에 매여서 거기서 안정을 누리려고 합니다. 세상은 모든 것이 변하고 있습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정지상태란 없는 상태입니다. 계속 변화하고 있는 속에 나만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나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매한 인격으로 착각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내가 안 변하고 있는 겁니까? 그런데 문제는 변하지 않는 것은 안 변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내가 지금 퇴보라고 하는 거꾸로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이 아닌가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왕 변할바에야 퇴보로의 변화보다는 생명으로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은 2024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2025년이라는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그런 변화하기를 요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변화하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본론)

)6가지 옛 사람의 특징과 결과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옛사람, 즉 육신과 정욕을 삶의 주체로 삼는 옛사람에겐 여섯 가지 특성과 습관이 있음을 지적하며, 그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아울러 지적해 주고 계십니다. 그럼 그러한 6가지 특성과 결과는 무엇일까요?

1)
첫째는 허망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목적을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의미를 잃어버린 삶입니다. 아주 허무하고 무의미한 세상, 허우적거리기만 했지 무엇 때문에 그러하는지를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긴 하는데 목적이 없습니다. 결혼을 했는데도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삶이라는 것이 온통 허망함에 빠져듭니다.

2)
그 다음에는 어두움이라 그랬습니다. 이 말은 본문 말씀대로 총명이 흐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 판단하는 능력, 이성의 능력이 어두워진 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3)
그 다음에는 무지함이라 그랬습니다. 무지하다는 것은 도덕적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선악의 구별이 모호해 지는 것을 이릅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분간하질 못하는 그런 상태에 빠져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버려야 할 옛사람의 습성이라 했습니다.

4)
네 번째는 마음이 굳어진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강퍅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고집만 남아서 자기 집착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손해를 보아가면서도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5)
다섯 번째는 무감각해진다 그랬습니다. 굳어진 마음이 결국 무감각을 불러 옵니다. 한 마디로 감각능력 상실입니다. 어떤 자극에도 감각이 없습니다. 반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마저도 무뎌진 채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6)
여섯 번째는 방임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영어로 말하면 Give up, 즉 포기 상태입니다. 이건 요즘말로 될대로 되라(캔세라 세라?)입니다. 더 이상 기대를 걸 수가 없을 만큼 인간됨을 포기한 최악의 상태입니다.

 

예화)이런 경우들이 어느 중국 영화에 잘 나와있습니다. 그 제목이 중국의 44번 버스 입니다. 44번 버스는 2011년 중국에서 상영된 영화로서, 1999 Lianhe Zaobao라는 중국 지방신문에 실린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용 소개=중국에서 어떤 여성 버스 운전기사가 버스를 운행하며 산길을 넘고 있었는데, 건달패 2명이 여성 기사한데 달려들어 성희롱을 하였습니다. 승객들은 모두 모르는 척하고 있는데, 어떤 중년 남자가 양아치들을 말리다가 심하게 얻어 맞게 됩니다.

급기야 양아치들이 버스를 세우고 여성 기사를 숲속으로 끌고 들어갔고 여성기사는 성폭행을 당한 후 한참 뒤 돌아옵니다. 그리곤 그 여성 기사는 아까 양아치들을 제지했던 중년 남자에게 다짜고짜 버스에서 내리라고 소리 소리를 지릅니다. 중년 남자가 당황해 하면서 “아까 내가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느냐? 왜 날 내리라고 하냐? 고 따지자, 그 여성 기사는 마구 소리를 지르면서
당신이 내릴 때까지 출발 안 한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래도 중년남자가 안 내리려고 버티니까 승객들이 그를 강제로 끌어내리고 짐도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버스가 출발했는데 그 여성 기사는 얼마간 버스를 주행하다가 커브 길에서 속도를 가속해서 그대로 낭떠러지로 추락해 버리고 맙니다.

결과는 전원 사망이었습니다. 중년 남자는 아픈 몸을 이끌고 한참 동안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사고 현장을 목격합니다. 그 중년 남자가 교통을 통제하는 경찰관에게 어쩐 일이냐고 묻자, 경찰관이 말하기를
버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승객들이 모두 사망한 사고라고 말했습니다. 그 중년 남성이 멀리 낭떠러지를 바라보니 자신이 타고 왔다 쫓겨난 바로 그 44번 버스였습니다.

그 여성기사는 오직 살만한 가치가 있던 유일하게 양아치들의 악행을 제지했던 그 중년 남자를 일부러 버스에서 내리게 하고서 모른 척 외면했던 승객들을 모두 지옥으로 데리고 갔던 것입니다.

그 중년 남성은 그 장면을 바라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이 영화에서 건달들은 물론이요, 방관자들은 허망하고 악에 무뎌져 자기만 살겠다고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육신적 인생들, 악에 무감각하고 총명이 사라진 사람들, 옛사람의 전형적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모든 유사한 행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버리기를 요구하는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 2024년을 지내오면서 우리에게 이런 옛사람의 삶의 모습들이 있었다면 반드시 버리야만 합니다. 그리고 2025년도에는 새로워져야만 합니다.)

 

)새사람을 입으라

그런데 오늘의 본문 23절 말씀을 잘 보면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라고 하십니다.

<심령>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헌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듯이 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집에 돌아올 때 자기 자신을 생각합니다. ‘나는 아들 자격이 없다.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 상하게 했고 너무 많이 타락된 생활을 했고, 나는 아버지 앞에 제대로 된 아들자격이 없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저를 머슴꾼의 하나로 대접해 주세요. 그렇게 해서 굶지 않고 살게나 해주세요." 라는 겸손하고 초라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를 만나는 아버지는 다릅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영광된 잔치에 참여케 합니다.

새로 입힌 아름다운 새 옷을 통하여 아버지의 참된 아들임을 밝혀 주었습니다.

옷은 때로는 그 옷을 입은 자의 신분을 나타냅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낡은 옷은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으라."고요.

 

아버지와 만나는 관계에서 새 옷을 갈아입고 새사람이 된 탕자처럼, 지나간 과거를 헌 옷 벗듯이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물질로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긴 말이 졸부입니다. 환경으로도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우리는 구조 조정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그것만이 살 길이라고 몸부림쳐왔습니다. 그러나 구조조정을 하는 그 사람이 구조조정이 안됀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람의 근본이 달라지기 전에는 구조를 100번 바꿔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북한이 수없이 개혁을 외치지만 그 나물에 그 밥입니다.

 

구조를 바꾸고 사회제도를 바꾸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던 사람이 [칼 마르크스]입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습니다. 그런 고로 외적문제로는 내적문제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내적인 것은 내적으로, 영적인 것은 영으로만 가능합니다. 내적인 변화가 있을 때 비로소 사회도 인간도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즉, 심령이 새로워져야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에 만이 사람이 사람다워집니다. 만사의 근본은 영적 문제요, 그것은 하나님말씀과의 문제요, 하나님과의 만남의 문제입니다.

 

)새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러면 바울 사도는 새사람을 입으라 하면서, 어떤 것이 새사람이라 했는가를 알아 보겠습니다. 본문 22~25절을 봅니다.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1)옛사람을 벗어 버리는 사람입니다. 즉 옛 고집과 죄성과 악한 습관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옛사람의 무리들과 결별해야 합니다.

조직 폭력배인 깡패께서 어떻게 깡패 일을 그만 둘 수 있습니까? 그 조직에서 나와야 합니다. 한국의 어떤 유명한 연예인 여성이, 조폭인 남자가 계속 자기랑 결혼하자고 하여 그 여성이 결혼의 조건을 걸었습니다. 당신이 그 폭력 조직에서 나와 깡패 짓을 그만두고 목회자가 되면 내가 당신과 결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조폭이 그 조직을 그만두고 나오면서 결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전도사가 되었습니다(이영화 & 장병하 전도사).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사람들, 원인들과 작별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 옷을 입은 자들과 교제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옛사람을 벗는 첫걸음입니다.

2)의를 행해야 합니다. 의는 마땅히 행해야 할 성도의 근본 행실입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하신 그런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의는 그저 바라만 보는 거이 아닙니다. 불의를 보고 가만히 있으면 방조자가 되고 공법이 됩니다. 불의를 보면 그것은 아니다! 잘못 되었다! 고 말해야 합니다. 방관하지 말고 막아서야 합니다. 그러다 핍박을 당할 수도 있지만, 훗날에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3)진리를 따라 가며 거룩한 생활을 힘써야 합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리스도의 말씀이요, 복음을 말합니다. 진리를 좇아가야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거룩은 진리를 따라 갈 때 성취 됩니다. 진리는 우리를 죄로부터 지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죄는 만지지도 말고 가까이 하지도 말고 부러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죄의 근본은 교만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가르치고 행하는 일입니다. 죄의 두번째 근원은 탐심입니다. 물질이나 명예를 위해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는 일입니다. 새치기, 사기, 거짓 증언, 도적질, 살인, 강도, 강간 등이 이 탐욕에서 옵니다.

 

4)거짓을 버려야 합니다. 거짓은 가장 쉽게 저지르는 범죄요, 가장 흔하고 쉽게 저지르는 범죄입니다. 거짓은 마귀 사단에게서 왔습니다. 그래서 사단의 거짓의 아비라고 합니다.

 

5)고로 참된 말을 해야 합니다. 거짓을 버리는 동시에 그 공간을 참말로 메꿔야 합니다. 사람은 말을 안 하고는 살기가 곤란한 피조물로 창조되었습니다. 할 말을 못하면 입이 간지러워 미치게 됩니다. 고로 참 말을 해야 합니다.

 

참말을 하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방편이기도 합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안 하면 다른 사람들이 헷갈립니다. 그것이 옳은가 아닌가? 참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 말을 따라가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왜 입니까? 복음은 진리, 곧 바른 말이요. 사실이요.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를 새해에도 열심히 전하십니다. 또 복음 전하는 자들과 더욱 열심히 합력하십시다. 그것이 새삼람을 입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할렐루야!


결론)

오늘 더욱 새 옷을 입고 옛사람을 버리기 원하시는 성도 여러분! 새로워지고자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려 수고하며 이 자리에 동참하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여러분의 <심령>이 더욱 새로워지는 복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도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길 힘쓰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온전히 되어 가는 2025년 한 해가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122724 안익선 목사/ 참조: 김철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