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 6장 강해(오병이어의 기적과 생명의 떡 되신 예수님)

호걸영웅 2025. 3. 19. 23:46

요한복음 6장 강해(오병이어의 기적과 생명의 떡 되신 예수님)

 

찬송가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서론)

6장에는 디베랴 바다 건너편 골란 고원 근처 언덕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사건과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님에 대한 설명, 그리고 그 말씀 후에 떠나간 제자들과 남은 제자들에 대한 기록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본론)

)오병이어의 기적(1~15)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갈릴리 바다 건너편 동북부에 있는 산 언덕에 모였습니다. 본문 1절에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라고 표현한 것은 요한복음의 1차 독자들이 ‘갈릴리’라는 이름보다 ‘디베랴’라는 이름에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전통적으로 게네사렛 평야와 맞닿아 있어 게네사렛 호수(5:1)로 불리기도 하였고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이 수금(긴네렛)과 닮았다고 해서 긴네렛 바다(34:11. 3:17, 13:27)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헤롯 안디바가 주후 22년에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카이사르(Tiberius Caesar)의 이름을 따서 ‘디베랴’라는 이름의 도시를 세우게 되었고 그 후 디베랴 바다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동쪽 지형은 높은 땅이 예리하게 솟아 있는 곳으로 오늘날 ‘골란 고원’에 해당합니다. 그곳에 최소한 5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가 예수님의 베푸신 치유의 기적들을 목도한 후,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유월절이 임박한 때 즈음이었습니다. (4절 참고)
그때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7)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시험하고자 질문 하셨다는데 이는 빌립으로 하여금 문제 상황 속에서 믿음 사용법을 교훈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빌립은 매우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었기에 이백 데나리온이라는 최소액을 말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치 임금이었습니다. 현싯가로는 대충 10만원*200=2,000만원어치 식량입니다.

 

(8-9)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그러자 잠시 후, 안드레는 보리 빵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던 한 소년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오병이어는 소년의 허기를 채우기 위한 지극히 적은 식사량이었으며 그 양은 최소한 오천 명의 식사로 제공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것입니다. 우리는 빌립과 같이 문제해결을 위해 이백 데나리온을 구하는 신앙생활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주님께 ‘문제해결을 위해 최소한 이백 데나리온이 필요합니다.’라며 우리 수준의 정답을 이미 문제해결의 유일한 방법으로 확신하며 아주 구체적으로 주님께 기도하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10-13)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주님께서는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축사하신 후에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 남을 정도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닙니다. 의식주는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이지만 기본적인 의식주가 채워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힘으로 삼고 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삶의 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14-15)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오병이어로 배부르게 된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 선지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선지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약속하신 신명기 말씀(18:15-19)에 근거한 것입니다. 큰 무리의 영적 수준은 먹고 사는 문제에 머물러 있었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셔야 했습니다.


)물 위를 걸으신 기적(16~21)

(16-19)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갈리리 동북단)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예수님께서 큰 무리를 피해 혼자 산으로 떠나신 후 제자들은 배를 이용해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적 특성으로 돌풍이 종종 발생했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바다에 익숙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캄캄한 밤 중에 돌풍까지 만나 힘겹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오셨습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두려워하였으나 제자들은 기쁨으로 예수님을 영접했고 순탄하게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22~40)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6:35)고 하셨습니다.

1.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라( 6:26~27)=사람들은 오랜만에 포식하여 포만감에 젖어 있었 습니다. 그런데 자고 나니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날 빵을 배부르게 먹던 생각이 나서 그곳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계실만한 곳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혹시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가신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습니다. 그들은 너무 반가워 코가 땅에 닿기까지 “선생님,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 인사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면 영적인 소원과 예수님께 대한 열심히 대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전날처럼 환영하지 않고 냉정하게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6:26)

요한복음에서 표적(Sign)은 그 사건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사건 뒤에 숨겨진 의미가 중요하며 그것이 본래의 목적입니다. 무리는 오병이어의 표적에서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생각해야 했습니

. 예수님의 능력과 인격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이제 떡을 먹고 배부른 후에는 아예 예수님을 빵 공장 사장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배가 부르자 예수님을 이용해서 계속 빵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차원으로 승화한 것이 아니라 육의 양식만을 구하는 동물과 같은 물질 차원으로 전락했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6:27)=‘썩을 양식’이란 없어질 육의 양식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명예, 권세, 타이틀 등을 포함합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이란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 일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고 영원한 것을 위해 살면 그 인생도 영원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2.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6:28~29)

예수님께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하라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님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6:28)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6:29)=‘하나님의 일(The works of God)’은 단수로,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거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곧 예수님을 믿거나 믿게 돕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곧 생명의 떡이다( 6:30~59)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40년 동안 만나를 먹인 것 같이 그들에게도 한 번만 아니라 계속해서 양식을 주면 메시아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만나를 주신 영적인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깨닫도록 위함이었습니다( 8:3). 또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올 메시아의 모형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6:34)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

사람에게는 육신의 배고픔과 영적인 배고픔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떡이 필요합니다. 떡은 고상한 용어로 경제 문제입니다. 떡 문제는 사람의 기본 욕구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떡보다 절실한 현실문제는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금강산도 식후경”, “사흘 굶어 담 안 넘어 가는 사람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굶주림보다도 더 비참한 것은 영적인 배고픔입니다. 

. 불신자는 공허하고 허무하고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그러다가 마약에 손을 댑니다. 재벌 3세들이 무엇이 부족해서 마약에 손을 댑니까? (도박, , 방탕, 호색 등 포함).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4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느리라.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성경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께 믿도록 인도해 주십니 다.

 

)예수를 떠난 제자들(60-66)
 
본문은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들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특히 60-66절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떠난 제자들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또한, 오늘 본문은 6장의 결론이자, 예수님의 공생애 2년 동안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빵(혹은 떡)은 조상들이 먹었던 것(만나)과 같지 않기에,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이 말씀은 어렵다.”였습니다. ‘어렵다’라는 말의 의미는 “당신이 우리에게 잘 먹여 준 것은 좋은데, 만약 당신이 우리에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는 분이라면 우리는 당신을 따르기가 힘들겠습니다. 물질적인 것이 해결되지 않는데, 영원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영원을 따라 사는 것은 어렵겠소.”입니다. 그래서 상당수의 사람들은 예수를 떠나가 버렸습니다.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아울러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처음부터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귀라고 했습니다.

)예수께 남은 제자들(67-71)
마침내 제자라고 칭했던 많은 사람이 물러가고,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랐던 12제자들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많은 사람이 물러가고 난 후에 예수님께서 느끼시는 고독감이 깊이 느껴집니다. 이 질문에 제자들의 대표 격인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68-69)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또한,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근거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베드로가 또렷하게 아는 사실은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은 자신의 총명함이나 분별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선택하시고, 불러주시며, 구원해 주신 은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70-7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가룟 유다는 많은 제자가 예수님을 떠나갈 때, 자신은 떠나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의 마음이 예수님을 향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이후에도 가룟 유다는 1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기의 길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셨지만, 유다는 끝까지 자기의 욕망을 버리지 않더라”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하루도 우리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길과 가룟 유다의 길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낮추었던 세리의 길과 자신을 높였던 바리새인의 길과 같습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둘 다 부족한 사람이었고, 죄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은 주님을 따라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갔고, 또 한 사람은 재물과 자신의 욕망을 좇아 영원한 형벌의 길로 갔습니다. 오늘 하루, 영원한 생명의 떡을 공급하신 에수님께 감사하며 그의 길을 함께 걷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030225 안익선 목사/ 참조:최현준, 정한조, 김산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