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엘에
대한 경고(이사야 29장 1-24/읽기=1~8)
성경의 첫 시작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시작합니다. 어떤 자들은 첫 시작의 이 말씀부터 부정하므로 성경책을 덮어버리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진화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처음 생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증명하지도 못하면서 창조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경의
첫 시작부터 하나님이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믿는 믿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도 지으시고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이 믿음의 첫 걸음입니다.
다윗도 이 놀라운 비밀을 깨닫고 고백하기를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139:13-14)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후손들이 다스리는 남 유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지으심 받은 자라는 사실을 망각하였습니다.
첫 번째. 슬프다 아리엘이여
(사29:1-4)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의 진 친 성읍이여 연부년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2) 내가 필경 너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네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 (3) 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군대로 너를 에우며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 (4)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히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거리리라”
사마리아를 가리켜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 이라고 칭하면서 그들의 죄악을 지적했던 선지자는 이제 예루살렘을 가리켜 “다윗의 진친 성읍 아리엘”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왜 이사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을 “아리엘”로 불렀을까요?
“아리엘” 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화로” 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번제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찾아오는 절기였던,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해마다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을
지냈습니다.
그렇게 해마다 절기를
지켰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괴롭게 하고, 슬퍼하고, 애곡할
것이라” 고 선포하십니다.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는 너무도 형식적이고 의식적이었습니다. (사1:11-13)에서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러운 죄악을 그대로 가지고 뻔뻔하게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짐승의 피만 흘리면 하나님이 제사를 다 받으실 수 알았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많은
자들이 하나님께 예배만 드리면 다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라고 해서 다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지 아니하면 그것은 인간의 모임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내 마음과 정성을 다해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마음을 드리되 에수의 보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에 생명을 바치는 산제사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아리엘을
도우시는 하나님
(사29:5-8) “그럴지라도 네 대적의 무리는 세미한 티끌 같겠고 강포한 자의 무리는
불려 가는 겨 같으리니 그 일이 경각간에 갑자기 이룰 것이라 (6) 만군의 여호와께서 벽력과 지진과
큰 소리와 회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것인즉 (7) 아리엘을 치는 열방의 무리
곧 아리엘과 그 보장을 쳐서 곤고케 하는 모든 자는 꿈 같이, 밤의 환상 같이 되리니 (8)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같이 시온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
그런데 하나님은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서 예루살렘을 공격한 자들도, 즉 앗수르 군대를 티끌과 겨처럼 날라 가버리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6절에 보면 6가지로 앗수르 세력을 징벌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벽력, 지진,
큰 소리, 회리바람, 폭풍, 맹렬한 불꽃”으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히스기야 왕 시대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하고자 할
때에 앗수르 군대가 그 밤에 18만 5천명이 떼죽음을 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앗수르의 계획은 7-8절의 말씀처럼 밤의 꿈처럼, 밤의 환상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가 꿈속에서 아무리 먹고 마셔도 여전히 그 속은 비고 갈증을 느끼듯이, 그들의 악한 계획은 헛일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29:9-14)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11)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12)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14)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무서운 앗수르 재앙의
메시지를 외쳐도 회개하지 않고, 놀라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해도 감사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향해, 심판이 또 다시 선포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줄 모르는
유다 백성들의 영적인 무지와 무감각은, 술에 취해 감각을 상실해 버린 자와 같고 전혀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과 같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살아가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고 합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원어로 해석해 본다면 “너희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의심하고
믿지 못해 머뭇거려 보아라. 그러면 그 결과로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눈을 감아 보아라. 그러면 그 결과로 눈이 멀게 될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살아간다면 그의 삶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깊이 잠들게 하는 신” 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깊이 잠들어 마치 죽은 자와 같은 영적 무감각 상태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둘째. 머리를 덮히게 하십니다. (10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리는
선견자였습니다. 선견자는 선지보다 더 오래 전부터 사용된 명칭으로 선지자와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보는 자였습니다. 선견자의 머리가 덮였다는 것은 선견자 자신도 갈 길을 보지 못해 백성들을 바로 인도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 말씀이 봉해진 책이 되었습니다.(11-12절)
유식한 자들은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지도자들인데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이 닫혀져 버렸기 때문에 읽어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넷째. 입으로만 신앙 생활하게 될 것입니다. (13절)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계명을 가르침 받을 때 이런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마7:21)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하셨고,
(갈1:8)도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원치 않는 제사를 드려선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기이하고 기이한 일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14절)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기이한 일은 강력한 세력을 통해 예루살렘의 심판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기이한 일을 당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지혜가 없고, 적절한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총명도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 토기장이의
하나님
(사29:15-24) “화 있을진저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하는 자여 그 일을
어두운데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16)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17) 미구에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않겠으며 기름진 밭이 삼림으로 여김이 되지 않겠느냐 (18)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19)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20)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경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 (21) 그들은 송사에
사람에게 죄를 입히며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를 올무로 잡듯 하며 헛된 일로 의인을 억울케 하느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세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누가 우리를
보랴 였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몰랐습니다.
(시139:3-4)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온 세상에 영으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누가 우리를
알랴 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속까지도
감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전지성을 몰랐습니다.
(렘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우리의 생각까지도 알고
게신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지도자들의 생각이 이러했으니 백성들은 어떠했겠습니까?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토기장이와 진흙을 혼동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한 조각의 질그릇은 그
존재 자체가 토기장이에 의해 지어졌다는 사실을 확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물건이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고 말한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그들은 또한 자기를 빚은 자에게 “그가 총명이 없다” 하는데 이 말은 곧 “그가
무식하다” 말하는 것인데 피조물이 조물주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 주위에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그들이 부인하고 무시해도
인간은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의 손에 지음을 받은 나약한 질그릇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은 또 다시 한
번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을 17절부터 선포하고 있습니다.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은
자신의 손에 들려져 있는 예루살렘 그릇을 깨뜨려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먼 미구를 생각해서 즉 그
날을 위해서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미구의 그 날이 어떤
날인지 3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자연에 대변화가 있을 것입니다.(17절)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않겠으며 기름진 밭이 삼림으로 여김이 되지 않겠느냐”
레바논은 이스라엘 북부에
위치한 산맥으로 지중해를 향해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습니다. 이곳은 정상에 언제나 눈이 덮여 있는 헤르몬
산이 있고 무엇보다도 높고 쭉 뻗은 백향목의 삼림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러한 높고 웅장한 레바논 산맥이
낮아져 기름진 밭이 된다는 것은 곧 평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평지에 있던 기름진 맡이 높고 울창한
삼림 지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마지막 때에 자연계에 대변화가 생긴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둘째. 그 날에 영적인 대변화가 있을
것입니다.(18절)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여 무지한 자들의 눈을 뜨게 하고 귀를 열어주셨던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도 마지막으로 성령의 대역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셋째. 겸손한 자와 광야의 신앙을 가진
자들만이 즐거워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19-21절)
교만한 자는 절대로 그
날에 즐거운 자리에 들어올 수 없을 것입니다. 20절에 나오는 “강포한 자”, “경만한 자”, “엿보던 자”들은 하나님의 연회의 자리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또한 빈핍한 자, 즉 광야의 신앙이 아닌 자는 절대로 그 자리에 들어설 수 없을 것입니다.
21절에 나오는 사람에게 죄를 입히고 올무로 잡아 의인을 억울하게 한 자들도 절대로 하나님의 연회의 자리에 들어올 수 없을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구속적 축복
(사29:22-24)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야곱 족속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야곱이 이제부터는 부끄러워 아니하겠고 그 얼굴이 이제부터는 실색하지 아니할 것이며 (23) 그 자손은
나의 손으로 그 가운데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자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24) 마음이 혼미하던 자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것처럼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 그 날에 택하신 자들을 어떻게 축복하여 주시겠다고 하셨습니까?
첫째. 택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고 조롱한 그들이 철저하게 심판을 받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얼굴을 실색하지 아니하게 하실
것입니다.
실색은 창백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거룩한 자로 칭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을 경외할 것입니다.
다섯째. 지혜로운 자가 될 것입니다.
(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성도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때로는 사람들에게 수모와 천대를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거룩한 의를 구별한 자로 세워 복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호6:3)은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의 의로운 손에 붙들려 귀하고 복된 자로 쓰임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참조:곽노아 목사/편집;안익선 2013.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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