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야 강해

고난받는 종의 사명(이사야 53:1-6 )

호걸영웅 2013. 11. 23. 04:58

 

                                                            고난받는 종의 사명(이사야 53:1-6 )


[]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서론)

1.찬송가의 왕이라고 칭송을 받는 아이작 와츠 (I. Watts, 1674-1748) 곡이 우리 찬송가에 15개 정도가 있는데, 중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찬송가가 3개입니다. 왕의 주께서 (151)” “ 말인가 위하여 (143)” “ 달려 죽은 십자가 (149)입니다.  

그런데143 가사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 말인가하여 돌아 가셨나 벌레 같은 위해 받으셨나 (2) 지은 지시고 박히셨으니 일인가 은혠가 사랑 크셔라 (3) 십자가 박힐 해도 잃고 밝은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4) 십자가 대할 때에 일이 고마워 얼굴 감히 들고 눈물 흘리도다 (5) 울어도 눈물로 갚을 알아 밖에 드릴 없어서 바칩니다.

 이런 훌륭한 가사인데도 불구하고 아이작 와츠의 찬송시에 대해 처음에는 이단 시비가 많았다고 합니다.

완고한 칼빈주의 목사들이 예배 시간에 그의 찬송가를 불러서는 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1789 필라데필아에서 열린 미국 장로교회 1 총회 , 아담 랭킨 (Adam Rankim) 같은 목사는 단상으로 뛰어 올라가서 예배 때는 다윗의 시만 사용해야 합니다. 아이작 와츠의 찬송을 이상 허용해서는 됩니다. 나는 말을 하기 위해서 켄터키에서 말을 타고 올라 왔습니다이렇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많은 교회들이 아이작 와츠의 찬송을 예배 시간에 부르고 있었고, 교인들은 그의 찬송가에서 많은 은혜를 받고 있었습니다.

결국 총회에서는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 기독교적인 사랑을 발휘해야 한다. 이상 와츠의 찬송가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공식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찬송가 143장은 특히 1 가사에 나오는벌레 (worm)라는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작 와츠의 찬송를 부르는 교회에서도 가사를 같이 보잘 없는 것을 위해이렇게 바꾸어 부르기도 하고, 어떤 교회에서는 같은 죄인을 위하여이렇게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교회에서는 여전히벌레 같은 위해이렇게 원래 가사대로 불렀다고 합니다.

찬송가 해설로 유명한 어니스트 에뮤리안 (Ernest K. Emurian) 가사를 이렇게 해설했습니다. 우리가 벌레가 아닌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벌레만이 하나님의 세계에서 나비로 변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이작 와츠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사람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에 있는 말씀 중에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가장 밝혀 주는 말씀이 오늘 읽은 이사야 53장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말씀을 읽지는 않고 1-6절까지만 읽었습니다. 말씀은 대략 B. C. 700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까지 그만큼의 상당히 먼 시간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기록한 이사야 말씀 속에 예수님에 대한 말씀은 너무도 분명하고 생생하며 경이롭기만 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경전이 있지만 자신들의 교주에 대하여 수백여년 전부터 예언된 예언이나 기록이 있는 경우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공자나 석가나 마호멧 등은 전혀 예언된 말씀에 응하여 태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경 외에는 다른 어떤 책에도 이런 경우가 없습니다. 

52말씀에 사람이 등장합니다. 신학자들은 사람을고난 받는 (a suffering servant)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사람의 이름도 신분도 미리 정의하지 아니한 채로 기록되었습니다.

 고난 받는 모습이 어떠하다 했습니까? 

첫째로, 고난 받는 아무 볼품이 없다 했습니다. 마른 땅에서 올라온 줄기처럼 말라 비틀어져서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런 싹은 언제 말라 비틀어져 죽을지 아니면 금새 벌레에게 씹혀 먹힐지 도대체 소망이 없어 보이는 모습입니다. 그 고난의 종은 날 때부터 아름다운 것이라고는 찾아 없고, 그에게서 아무 것도 매력적인 부분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attractive ) (1).  

둘째로,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미움과 멸시와 아픔과 고통을 받았습니다. 인물이 없는데다가 사람 복도 지지리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사람을 쳐다 보려고 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3). 여기서 멸시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바로 자기 백성이요 자기 민족이었습니다.

셋째로, 그는 우리의 질병을 대신 짊어졌고, 우리의 아픔을 대신 겪었습니다(4). 그가 그렇게 아픔과 고통을 받은 것은 우리가 당할 아픔을 대신 당한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고도 했습니다(5, 12). 그는 우리의 허물을 대신해서 채찍에 맞았고, 우리를 대신해서 상처를 입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고침을 받았고, 덕분에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사람이 그런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벌을 받은 거야!하고 너무도 간단하게 정의를 내려 버리고 맙니다.

넷째로, 이런 사실이 하나님께서 온 것이라고는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1절에Who has believed our message? To whom has the Lord revealed his powerful arm?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한탄에 한탄을 합니다.

고난 받는 통하여 하나님의powerful arm 나타났는데도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powerful arm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능력을 표현하는 시적인 말입니다. 고난 받는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이스라엘에 나타났는데도 그 백성 누구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고난 받는 대하여 이사야 53 말씀을 읽어 내려가면, 11절에 의로운 종이 많은 사람을 의롭게 것이며, 그들의 죄를 짊어질 것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다가의롭다” “의로운” “이런 말이 나오면 하나님과의바른 관계를 가진”이라는 말로 해석하면 틀림 없습니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2:16 나오는하지만 우리는 율법을 따른다고 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압니다

말씀에서의롭다 함을 받는다 말은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된다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고난 받는 하나님의 의로운 종이라고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멸시를 받는 사람이었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픔과 죄를 대신 짊어졌기에, 그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말씀은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송명희가 찬양 중에우리의 어두운 눈이라는 찬양시가 있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이 그를 미워했고 /우리의 캄캄한 마음이 그를 몰랐으며 /우리의 무지한 채찍질로 그를 내리쳤고 /우리의 악독한 혀가 그를 정죄했으며 /우리의 폭력의 손길이 멍들게 때렸으며 /살인자의 본받아 우리는 그를 찔렀소 /우리는 그를 죽였지만 우리는 그를 죽였지만 /그는 살아 나셨고 우리의 악함을 우리의 악함을 벗기셨 //

이 복음성가의 내용처럼 우리가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8절 말씀같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양은 지독한 근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양의 특징은 잘못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가 있고 양치기 개가 있는 것입니다. 산이든 들이든 강이든 위험을 잘 모르고 막 가는 것이죠. 그렇게 행한 온 인류와 나 때문에 예수는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사는 것입니까? 로마서 6:11~13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3절에서“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하십니다.

[] 6:13

Neither yield (=produce 산출하다, 내다,몸을 맡기다,드리다,야기하다…) ye your members as instruments of unrighteousness unto sin: but yield yourselves unto God, as those that are alive from the dead, and your members as instruments of righteousness unto God.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의로운 일을 하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말씀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설명하고 나서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삶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과, 우리의 악함을 벗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고로 우리는 기꺼이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종으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 한가지,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의로운 종으로 사는 길은, 다른 사람의 짐을 함께 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고난 받는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마태복음 8:17). 예수님의 제자 마태는 이사야 53장의고난 받는 말씀을 읽다가 말씀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 주는 ,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사는 방식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다른 사람의 짐을 들어 주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길입니다 (Carry each other's burdens, and in this way you will fulfill the law of Christ).갈라디아서 6:2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 받아들인 사람들은 모두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크리스천의 삶이란 다른 사람의 짐을 서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가 먼저입니다. 나만 예수 믿고 살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크리스천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한 크리스천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불러선 안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

53장의 말씀이 우리 속에 성취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섬기는 교회의 지체들이, 아니 내가 먼저 변화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만의 관심에서부터 이제는 우리에 대한 관심이 생겨야 합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이 밝아져서 내가 주어야 형제들의 짐이 보여야 합니다.

내가 마음 써야 하고 도와줘야 형제 자매들이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의 메시지가 살아 움직이는, 아니 마구 꿈틀거리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듣고 사람들의 삶이 이렇게 변화되는구나!”하는 칭찬을 듣는 그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의 참된 등대 불이 되며, 소망의 불꽃이 되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13.11.19. 익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