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리라 (민14 : 26 – 35)
1. 유행가 가사가 절망적이고 슬픈 노래를 즐겨 부르는 가수는 대부분이 단명을 하고, 희망적이고 밝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크게 출세를 한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배호라는 가수는 60,70년대 우리나라가 한창 어려울 때 한이 담긴 노래를 부르므로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가 부른 노래를 많은 사람들이 애환을 달래며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가수는 불과 32세의 젊은 나이로 신장염에 폐렴으로 죽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때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라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노래를 불렀던 가수는 지금까지도 최고의 인기를 받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에 내 운명이 따라갑니다. 말은 기도요 저주요 고백입니다. 내 인격은 내 입에서 나오는 말에 있습니다. ‘말’은 마음 안에 있으면 생각이요, 입을 통해서 나오면 말(언어)이 되고, 말이 움직이면 행동이 됩니다. 말을 하면 마음도 같이 따라 갑니다. 슬픈 말을 하면 슬퍼 울게 되고, 기쁜 말을 하면 마음도 기뻐져 웃게 됩니다. 선한 말을 하면 선해지고, 악한 말을 하면 마음도 악해 집니다. 의식적으로 하는 말과 무의식적으로 하는 말, 어느 것이 진실이겠습니까? 맑은 정신으로 하는 말과 취중에 하는 말, 어느 것이 진짜이겠습니까? 의식적으로 하는 말과 맑은 정신으로 하는 말은 전부가 가장된 말입니다. 그러나 무의식중이나 취중에 하는 말은 진짜입니다.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받은 환자가 무의식중에 하는 말은 그 사람의 진실성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본문에 하나님께서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2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한 말에 대해 그대로 행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내 말이 내 운명을 만든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무심코 한 말이라도 하나님께서 다 듣고 그대로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본론) 1. 지금 좀 어렵다고 해서 자신을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2), 이렇게 했던 말을 하나님께서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 그럼 내가 너희 말대로 이 광야에서 죽도록 하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망’은 불평하고 누군가를 탓하는 것으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원망’은 결국 하나님께 하는 무서운 죄가 됩니다. 그런데 ‘원망’에 대해 하나님은 두 가지 면으로 이해를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불과 며칠이 안 되었을 때, 홍해가 앞에 길을 막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출14:11) 라고 하며 모세에게 원망했습니다. 그때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고 하시며 하나님께서 원망하는 백성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2. 마라에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을 때 또 모세를 보고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라고 하며 원망했습니다(출15:24). 그러나 책망하지 않으시고 나무 가지를 던져 쓴물을 단물로 만들어 마시도록 해 주셨습니다. 신 광야에 들어 섰을 때,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어 또 백성들은 모세에게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 도다”라고 원망을 했습니다(출16: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마디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라”(출16:7)고 말씀하시고 그날 이후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40년 동안 먹을 수 있도록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듣고 책망대신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3.그런데 바란 광야 가데스 바네아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는 말을 다 듣고 하나님은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27)고 하시며,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그대로 너희에게 행하리라”(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홍해 앞에서나 신 광야에서 했던 원망과, 가데스 바네아에서 한 원망이 다르냐? 그것도 아닙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여 하는가”(14:2,3)라고 원망했습니다. 홍해 앞에서나 신 광야에서 했던 원망과 별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원망은 듣고서도 오히려 홍해를 갈라지게 해서 원망하는 백성을 구원해 주셨고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원망은 무섭게 책망하시고 그 말대로 갚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원망을 듣고서도 하나님께서 다르게 반응하신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4. 출애굽 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듯 말듯 할 때, 홍해 앞에서 원망하는 것과 신 광야에 먹을 것과 마실 물이 없어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책망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 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굶기지 않고 목마르지 않도록 날마다 지켜 주시는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받고 있으면서 가데스 바네아에 까지 왔습니다.
5. 이제 모세는 열두 정탐꾼에게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열두 정탐꾼은 40일을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와 백성들 앞에 보고 하였습니다. 포도 한 송이를 두 사람이 메고 와서 백성들에게 증거물로 보여 주며,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열 정탐꾼은 ‘거기서 네피림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3) 고 하며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열 명의 부정적인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통곡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두 정탐꾼,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8)는 긍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열 정탐꾼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고 두 정탐꾼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는 그 땅을 차지 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열 정탐꾼은 믿음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역시 믿음 없는 백성들은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들이 원망한 말은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를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14:2,3)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우리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고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든지 아니면 이 광야에서 죽는 것이 더 좋겠다’고 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그들에게 죽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한 도전의 말입니다. 6. 원망에는 환경적인 것과 신앙적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환경적 원망은 어느 정도 하나님께서 이해하시고 오히려 원망을 듣고 여호와의 구원과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원망은 용서 보다는 그가 원망한 것을 들은 대로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홍해 앞에서 원망이나 신 광야에서의 원망은 환경적인 원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홍해가 길을 막고 더 이상 도망 할 수 없는 독 안에 갇힌 쥐처럼 뒤에 달려오는 애굽의 군대를 보았을 때, 아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어린 백성의 원망은 책망대신 홍해를 갈라지게 해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신 광야에서 먹을 떡이 없고 마실 물을 구할 수 없는 환경에서의 원망은 듣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도록 주셨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 마시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네스 바네아에서의 원망은 환경적인 원망이 아니라 신앙적인 원망이였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입니다(4). 그리고 이 광야에서 죽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은 신학적인 구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환경적인 어려움 때문에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히려 어려움을 막아주시고 더 좋은 환경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신학적인 원망은 구원에 대한 신앙 문제가 되기 때문에 쉽게 덮어 넘어갈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지 않아도 좋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옥에 가면 갔지 그런 것은 보고 가만 둘 수 없다’는 말 같은 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불평과 원망을 잘 합니다. 환경적인 원망은 어느 정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오히려 어려움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신앙적인 원망입니다. 자기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를 저주한다든지 믿음을 포기하는 것 같은 말은 참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화가 났을 때 자신의 신앙에 저주가 되는 말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십니다. 듣고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래, 내가 그렇게 해 주마’라고 하시고 그대로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원망을 다 듣고 당장 그들을 전염병으로 치고 멸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운 저주를 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모세는 여호와를 향하여 원망하는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중보의 기도로 전염병으로 죽게 하는 것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용서는 완전한 용서가 아니였습니다.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22,23)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기도로 일차적인 전염병으로 죽게 하는 것은 면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이 광야에서 죽는 것이 좋겠다’고 한 말대로 그들을 광야에서 40년을 뺑뺑이를 돌다 죽게 하셨습니다. 단 여호와와 갈렙 두 사람과 20세 이하에 어린 백성들을 제외한 원망했던 백성들은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야만 했습니다.
(결론)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인을 고쳐준 대가로 잡혀 매를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밤중에 그들은 찬미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옥에서 밤중에 찬미하고 기도했다는 것은 우리가 그냥 그들이 그렇게 하였구나 라고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얼마든지 원망을 할 수 있는 때가 옥중에 밤중입니다. 낮에는 잡혀 끌려 다니고 매 맞는다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요한 밤중에 불빛도 없는 캄캄한 옥중에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매를 맞고 옥에 갇혀야 하는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아닌데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렇게 당해도 가만히 계시는가? 얼마든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할 수 있습니다. 원망을 했다고 해서 잘못했다고 말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원망하지 않고 찬미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옥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원망할 만한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합니까? 참지 못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원망하는 말을 하나님은 다 들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도 원망하는 자들에게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과 실라와 같이 원망할 만한 일이 있을 때 원망대신 기도하며 원망대신 찬송을 하는 습관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닫혔던 문은 열리고 매였던 것이 풀어지는 역사가 여러분께 일어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참고: 허창수/ 익선 052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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