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 1-14)

호걸영웅 2015. 7. 28. 04:31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 18: 1-14)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무시하나

 

 

 

5.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사람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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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언젠가 '월간 조선'이란 잡지에 어느 유명한 한국 산악인의 기사가 실렸었답니다
.
그 사람이 히말라야의 어떤 매우 어려운 고봉에 도전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
고산 등정 때 보통 그러하듯이, 베이스캠프에서 출발하여 몇 차례의 캠프를 거친 후에 정상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지막 캠프를 설치하게 되면, 거기까지 함께 갔던 대원들 중에서 오직 두 사람만 이 최고 정상을 향하여 본격적인 도전하게 되는데, 바로 그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

그 산악인은 자기 후배인 어떤 대원 한 명과 짝을 이루어 등반 준비를 하게 되었는데, 그 준비란 것이 아주 간단했습니다
.
"
어이, 나는 카메라 메고 갈 테니까, 넌 뭐 좋아해? 아무거나 너 잘 먹는 것 챙겨." - 이것이 대화의 전부였답니다
.
8,000
미터 급의 고봉을 등정하려는 그 중요한 날 아침에 그 두 등반가 사이의 대화는 오직 그것 밖에 없었다는 거죠
.
왜냐하면 그 두 사람에겐 더 이상 긴 말이 필요 없었고 그저 눈만 마주쳐도 이미 마음이 통하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
그렇게 출발한 그 두 사람이지만,  등반 도중에 폭설을 만나고 눈 구덩이 속에서 이틀 밤이나 비박을 하는 등의 초인적인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고봉을 정복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

2.
가장 원활한 의사소통은 말보다 먼저 '마음과 인격이 통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바로 성도의 기도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라 하겠습니다
.

(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성도가 기도드릴 때 '하나님과 먼저 통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무엇인지를 우리 주님의 오묘한 비유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 )

) 기도는 소원만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

1. 본문 1절부터 5절에 기록하기를 "1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항상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
이것은 '자주 기도하라'는 뜻도 되고, 혹은 '계속 기도하라'는 뜻도 될 수 있습니다
.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너무 귀찮게 굴지 않기 위하여' 기도 횟수는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옛날 다니엘이 하루 세 번씩 기도 드렸으니 그것이 최대 한도라고 정해놓고 매일의 기도 횟수가 그것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
물론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희에게" 즉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도는 "항상" 드려야 하는 것이지 무슨 횟수의 제한 따위가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
하지만 그처럼 '항상 기도'하기 위해서 꼭 한 가지 극복해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
왜냐하면 '낙망'이야말로 기도하는 사람이 가장 대표적으로 겪게 되는 시험이며, '항상 기도'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
2.
기도하는 사람이 도중에 낙망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대체로 그것은 기도 응답이 기대했던 것처럼 속히 오지 않을 때입니다
.
바로 그런 경우에 낙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가르쳐주시고자 이 비유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던 것이었습니다
.

3.
또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즉 그는 오직 자기 생각과 욕심만 철저히 따라 거만한 사람이었습니다
.
그러니 불쌍한 사람에 대한 어떤 자비심은 말할 것도 없고 그저 공정한 재판 그 자체도 조금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
그런 재판관에게 한 과부가 "자주" 찾아와서 자기 원한을 풀어달라고 사정했습니다
.
그 과부는 그 철저히 이기적인 재판장을 움직일만한 아무 재력도, 연줄도 없는 힘없는 존재였습니다
.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단 한 가지 '자주 찾아가서 끈질기게 졸라대는 것'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통하게 되었습니다
.

처음에는 들은 척도 아니하던 그 재판장은 나중에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지 더 이상 번거로움을 당하는 것이 귀찮고 괴로워서 그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

4.
또 이어지는 6~ 8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6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

 
그 과부의 끈질긴 소청 때문에 냉정하기가 마치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재판관의 마음이 움직였다면, "하물며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 다음에 이어서 덧붙이신 말씀이 정말 의외적입니다.
"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어떤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

이것은 바로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할 줄 아는 확실하고 변치 않는 믿음'을 말합니다.
당신의 택하신 자들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물론 '속히' 응답해 주기 원하십니다
.

5.
하지만 그 '속히'라는 시간은 어떤 떼에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시간대에서 말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시간대에서는 그 '속히'라는 시간은 항상 '당장'이나 '며칠 이내'가 아니라, 몇 주일, 몇 달, 혹은 십여 년까지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그 약속을 하실 때에도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이처럼 기도 응답의 시기는 오직 하나님 나라의 시계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조금 기도해보다가 도중에 쉬 '낙망'하는 성도들이 많은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재림할 때까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항상 기도하는 믿음 가진 사람을 얼마나 보겠느냐?"라고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말세는 바로 기도가 망가져 버리는 시대요 기도의 결핍의 시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긴 간청을 못 이겨 들어줄 수밖에 없다면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야 얼마나 더 확실히 응답해주시랴.라는 철저한 신뢰야말로 신자로 하여금 끝까지 낙망치 아니하고 기도 드리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입니다.

) 기도는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하는 것입니다.


1.  9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엔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유를 서두에 분명히 밝히시면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의 기도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
그런 기도의 대표자 역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의 기도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온통 자기 자랑이었습니다
.
기도내용의 대부분이 다 자기가 얼마나 완벽하게 신앙 생활했는가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보고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함을 자랑했고   "소득의 십일조" 드림을 자랑했는데, 심지어 간과하기 쉬운 자기 텃밭에서 나는 '박하와 운향과 채소'의 십일조까지도 어김없이 계산해서 바쳤다고 자랑했습니다.
또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특히 "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

 2.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지금 같은 성전 안에서 같이 기도 드리고 있는 곁의 한 사람을 지목하여 자기와 비교하면서까지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3절과 14절에 기록하기를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3.
세리의 기도에는 조금 전의 바리새인의 경우와 같은 유창한 말이 전혀 없었습니다
.
하지만 그는 말 대신 몸으로 이미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멀리 서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성전 앞쪽으로 가까이 가는 것조차 엄두도 못 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감히 눈을 들지도 못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
자신의 부끄러운 죄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드러나 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
가슴을 치며"라고 했습니다. 실로 이 세리의 자세는 그냥 보아도 정말 백 마디 말보다도 더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말밖에 다른 기도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
하지만 그 기도야말로 하나님께서 들으시기에는 가장 유창한, 최고로 아름답고도 완벽한 기도였습니다
.
'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기도보다 더 아름다운 고백이 어디 있을까요?

이런 기도드릴 줄 아는 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십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오직 이런 기도드릴 줄 아는 사람만이 "자기를 낮춤으로써 높아지는," 즉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으로써 그 하나님께서 오히려 인정해주시는 의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확증해주셨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유창한 말이 아니라 오직 겸손한 자세에서 출발하는 기도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4. 바로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걱정하시던 그대로, 교회가 '말씀에 대한 믿음'은 남아 있는 것 같아도 '기도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기 시작할 때 이미 교회의 쇠퇴는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주일예배 출석교인 숫자가 늘어간다 하더라도, 기도회에 모이는 숫자가 함께 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결코 성장하는 교회가 아니라 이미 퇴보하고 있는 교회가 된다는 점을 잘 이해해야 되겠습니다.


결론)
기도는 하나님과 '언어'가 통하는 것 이상으로 그 '마음과 인격'이 먼저 통하는 것이야 합니다
.
언제든 변함없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길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의 능력은 얼마나 조리 있게 자기 소원을 하나님께 잘 아뢸 수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그 마음속에 얼마나 확실한가에 달려 있으며, 또 기도의 은혜는 기도에 사용하는 미사여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얼마나 솔직히 인정하고 고백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심령에 합당한 기도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참고: 석기현 / 편집:익선 07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