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강해

전지하신 하나님 (시편 139편)

호걸영웅 2018. 6. 30. 10:50

전지하신 하나님 (시편 139) 

 

서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소통! 소통! 하면서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도 이 소통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나날이 늘어갑니다. 

 

그리고 현시대는 사람들끼리 살을 비비고 이야기하면서 사는 시대라기 보다는 컴퓨터나 스마트폰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이모티콘이나 인터넷의 용어들은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는 양식을 더욱 간단하고 단순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때론 이모티콘이 우리의 생각을 잘 표현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사실 이모티콘이나 단순한 대화로 서로를 소통하는 것은 종종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성도들 가운데 신앙생활하는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아신다"는 것을 느낄 때 라고들 합니다. 

 

누구도 내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아무리 표현하려 해도 내 마음이 표현되지 않을 때, 그 분 앞에 잠잠히 기도할 때 "내가 네 마음을 안다...": 하는 감동을 느낄 때...... 우리는 소위 그런 특별한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평안을 느낍니다. 

 

본론)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1절부터 4절까지 그 분께서 나를 아신다는 표현이 매절마다 적어도 한 번씩, 다섯 번이나 걸쳐서 나옵니다. 

어떻게 아신다 했습니까? 

 

1절에 보니까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다"고 하십니다. 과학자가 어떤 사물을 매우 골똘히 연구를 하듯 신학자가 말씀을 아주 자세히 공부하듯...... 주께서 날 그냥 스쳐 지나가듯 보시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살펴 보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앉고 일어서는 것, 내가 눕는 것, 내가 가는 길을 살펴보신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만 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2절에 보니까 "멀리서도 내 생각을 아시고, 3절에 보니까 내 모든 행위를 아시고, 4절에 보니까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어원을 들여다보면 더 의미가 깊어집니다. "오 주여 주가 나를 계속적으로 살펴보심으로

나를 속속들이 아십니다. 주님은 내가 언제 넘어지는지 언제 일어서는지도 아시고 먼 곳에서도 나의 생각을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진행하는 것과 내가 무엇 때문에 주저앉는 지를 분별하십니다. 주께서는 내가 사는 방법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내 생각을 입술로 내뱉기 전에 이미 그것을 완전히 아십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내 생각과 내 입술의 말을 알 수 있을까요? 13절에 그 이유가 있지요.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즉 나를 만드신 분이시기에 나를 너무도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날 나아준 부모도 날 모를 수 있습니다. 

컴퓨터, 스마트폰의 소우자가 그것을 늘 다루어도, 자기가 쓰는 부분만을 쓰기 때문에 그 제품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 제품을 완전히 아는 사람은 그것을 설계하고 만든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나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나를 나의 부모보다, 나보다 더 날 잘 아십니다. 

 

자기를 알아보는 것에 감동해서 예수님의 제자 되었던 자가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에게 예수께서는  "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부터 너를 알았느니라"고 하십니다. 

 

또 삭개오는 자기도 처음 본 예수가 자기 이름을 부르며 돌 무화과 나무에서 내려 오라 하신 예수님을 주로 믿고 회개 하였음을 봅니다.

 

)전지하심의 양면성

  • 그렇다면 과연 그 분의 전지하심이 좋기만 한가요?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서면 죽는 줄로 알았습니다. ? 나를 속속들이 아시니까... 내 죄악이 다 드러나니까...

     

    ㅡ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섰을 때에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가장 큰 은혜이지만, 하나님의 반대 편에 섰을 때에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가장 큰 고통입니다. 

    죄를 지은 구약의 아간, 신약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등에겐 공포 그 자체요 심판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자꾸만 숨기려고 합니다. 아담도 범죄하자 바위 뒤에 숨습니다. 

    아담이 정말 영이신 하나님을 몰랐을까요? 바위 뒤로 가면 과연 하나님이 못 찾을 것이라 생각했을까요?  무화과 나무 잎으로 옷을 지어 입으면 육체의 죄를 가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까요? 물론 아니지만 한 순간만이라도 가리고자 한 행위들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좋을 때면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전능하심을 경험하며 살지만, 하나님을 등지면...... 내가 하나님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라, 감출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 죄인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면 하나님을 피할 것으로 생각하고 배를 타고 잠을 자면 하나님의 시선에서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죄인들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합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도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감찰해 달라고, 자기를 판단해 달라고 기도했던 다윗도...... 어느 순간 하나님을 피하고자 했던 때가 있었었나 봅니다. 그러나 그는 깨닫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라고 합니다.

    스올에 내 자리를 편다는 것은 지옥에 숨는 것을 가리킵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 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셨습니다.

    한 번 택한 자를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꽉 붙잡고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이게 은혜 받을 때는 더 없는 할렐루야인데, 신앙적으로 비뚤어져 있을 때에는 정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품에서 벗어나려 계속 나아가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빠져 들어가듯이, 가룟 유다가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가면 결국 죽음의 고통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다 보면 성도들과 다툴 수도 있습니다. 성도와 목사가 의견이 안맞아 다툴 수도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신실한 자들이었지만 다툼으로 길을 달리합니다. 그런 건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다투는 자는 정말 어리석은 자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정말 그릇된 것을 보아서 충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교회 지도자들이나 영성가들은 교회 안에서 누군가와 혹은 교회의 제도가 정말 그릇되어서 충돌할 때 ,이것이 신앙적으로 옳은가 그른가를 분별할 수 있는 길은 그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평신도가 때로는 심지어 목사와 다투더라도 기도할 때에 정말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진정 하나님께서 날 지지해주고 인정해주신다면 그 다툼은 거룩한 다툼이 될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 가톨릭에 대항해서 종교개혁을 할 때에...교회에게 맞서는 것은 그야말로 저주받을 짓, 종교적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매장되거나 사형에 처해지게 될 짓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그가 맞설 수 있었던 이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결책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니, 다윗은 하나님 앞에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 앞에

    자신을 내어 놓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가리려고 해도 하나님 앞에 감출 수 없으니까

    거꾸로 자기를 적극적으로 내어 보여 드립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라고 합니다.

     

    이렇게 나아갈 때에 정말 하나님의 깊은 은혜, 마지막 절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모든 인생길에서 악한 행위를 버리고 영원한 길로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십니다. 그 분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분의 전지하심은 내가 주님 안에 있을 때에 가장 큰 위로이자 힘이고 능력이 됩니다. 그런데 그 분의 전지하심을 망각할 때에 죄가 일어나고 교만이 일어나고 분열이 일어납니다.

    우린 늘 전지하신 하나님께 더욱 나 자신을 살피주십사 아뢰며, 하나님 앞에 나를 열어드리고 그분을 온전히 모셔 들이기를 기뻐할 때, 나의, 모든 삶 속에서 그의 구원이, 평안이, 영광이 내 삶에 온전히 임하게 될것입니다. 할렐루야!

    062118 안익선 목사/ 참고: 로고스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