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상 6장 강해(법궤의 귀환)
서론)
법궤의 귀환이 상징하는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과의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하나님은 결코 이길 수 없는 분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다곤신을 박살내어버리시는 신 중의 신이심을 인정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섬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이스라엘로 되돌려 보내는 결정만을 한 것입니다.
이런 블레셋의 모습은 오늘날 현대인들의 신앙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도가 귀신(혹은 귀신들린 자 또는 무당)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모습을 보아도, 즉 한 사람의 성도도 이길 수 없는 귀신을 보면서도, 그 귀신을 섬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게다가 성도들도 신앙에서 떠나 단지 종교 생활로서만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 마음이 그래도 편하고 그나마 다니지 않으면 어딘가 찜찜하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제별 문단 나누기: 1-9절: 법궤 반환을 결정하고, 반환을 위한 방법을 논의하기 위하여 블레셋 지도자들이 회의하는 내용. / 10-18절: 법궤가 이스라엘 경내인 벧세메스로 귀환하는 장면과 그 날의 제사를 기록하고 있고/ 19-21절은 법궤가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귀환할 때에 그곳 거민이 법궤를 들여다보다가 큰 재앙을 당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론)
가)법궤를 반환하려는 블레셋
1. 1-9절: 블레셋은 재앙을 면하기 위하여 언약궤를 다시 본처로 돌려보내려고 블레셋 거민들의 대표자들인 5방백이 모여서 그들의 복술자와 제사장(포로된 자들이거나 우상섬기는 젯장)들에게 언약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수 있는 방도에 대해 자문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경험과 지식에 입각하여 언약궤를 다시 돌려보낼 때에는 이스라엘의 신께 속건제를 드려야 하며, 또한 아직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젖 나는 소 두 마리가 이끄는 수레에 실어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볼 때 블레셋의 제사장과 복술자들은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에 대해서 일부분만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저들의 방법을 용납하시는 것은 저들이 율법에 대하여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묵과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2: 블레셋 사람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 그것을 어떻게 본처로 보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3: 그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贖愆祭)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거저 보내지 말고’ 이스라엘의 신께 대한 보상물이나 예물이 없이 언약궤를 보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 그 시대에는 신에 대한 경배 시 예물을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여호와의 진노를 풀어 드리기 위한 예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둘째 중근동 지역에는 남의 물건을 불법으로 취했다가 돌려보낼 때에는 보상금을 지불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언약궤를 빼앗았다 다시 돌려보내는 데 대한 보상금을 드리라고 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4: 그들이 가로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가로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
당시 블레셋은 5지방으로 각각 방백들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각기 1마리의 금쥐 다섯은 블레셋이 받은 독종이 쥐에 의한 것이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금독종은 블레셋 사람들이 입었던 질병의 종양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블레셋은 이처럼 재앙의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저주가 풀리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5: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독종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그가 혹 그 손을 너희와 너희 신들과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 하노라.
6: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에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하므로 하나님께로부터 큰 재앙을 받은 사건에 대하여서도 블레셋은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이하게 행하다’(알랄: עלל)는 ‘괴롭히다. 조롱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여호와께서 단번에 바로를 꺾을 수 있으셨지만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어 자신이 여호와임을 알게 하시고자 열 가지 재앙의 징벌을 내리신 것을 뜻합니다(출 10:1,2). 고로 블레셋은 더 큰 재앙이 오기 전에 빨리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자고 하는 것입니다.
7: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매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새 수레’는 다른 어떤 일에도 사용하지 않은 수레입니다. 블레셋은 이런 새 수레를 만들어 처음으로 언약궤를 실으려 한 것은 여호와께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멍에 매어 보지 아니한~소’ 아직까지 세속적인 일에 사용되어진 적이 없는 수레와 소를 사용하여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고자 한 것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신에 대한 두려움과 예의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젖 나는 소 둘’ 송아지를 거느리고 있는 어미 소입니다.
8: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하고
9: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블레셋은 아직도 하나님께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멍에 메어 보지 않은 소 둘이 보조를 잘 맞춰서 벧세메스로 수레를 끌고 간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아직 젖 나는 두 소가 송아지를 뒤에 두고 법궤를 끌고 곧장 벧세메스로 간다는 것도 모성본능을 거스르는 초자연적인 역사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런 두 가지는 소의 본성을 제어하여 벧세메스로 법궤를 가지고 가게 하시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면 비로소 이제까지 블레셋에 임한 재앙이 하나님의 행하신 것임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벧세메스(베트 쉐메쉬: בית שׁמשׁ)는 에그론에서 약 20km 떨어져 있습니다. 블레셋이 벧세메스로 법궤를 보낸 이유는 아마 그곳이 에그론에서 가장 가까운 이스라엘 성읍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나) 10-18절: 벧세메스로 간 법궤
하나님의 언약궤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탈취당한지 꼭 7개월 만에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다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10: 그 사람들이(블레셋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12: 여호와의 궤와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가니라.
뒤에 두고 온 송아지 때문에 모성적 본능이 나타나서 어미 소가 울면서 갔습니다. 이런 본능에도 불구하고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간 것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제어의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 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언약궤의 귀환 과정이 철두철미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임을 보여줍니다. 아무도 인도하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이르러 멈춘 것은 하나님께서 블레셋 지경에서 법궤를 운반, 이스라엘 지경으로 정확인 인도하신 결과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를 운반해 온 수레와 암소를 다른 용도에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에 그 수레를 도끼로 부수어 불을 지피고 그 소를 잡다 온전히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를 드리니라.
16: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블레셋의 방백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에 의해 법궤가 벧세메스로 운반되는 과정을 다 보고 에그론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는 이들 방백들을 통하여 블레셋 모든 백성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17,18 :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로 드린 금독종은 이러하니 이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드린 바 금쥐는 여호와의 궤를 놓은 큰 돌(바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견고한 성읍과 시골 동리 곧 다섯 방백에게 속한 사람의 모든 성읍의 수효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블레셋이 여호와께 속건 제물로 바친 금독종과 금쥐가 블레셋 전체 성읍과 거민을 의미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곧 블레셋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굴복하였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법궤를 들여다 보다 당한 죽음
19-21절: 돌아온 언약궤로 인하여 뜻하지 않은 무서운 사고가 일어나게 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죄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민 4:15, 17-20) 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가 블레셋에서 돌아오자 다시금 각성된 신앙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경건하게 대하지 않고 다만 호기심으로 언약궤를 들여다보는 죄를 범함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기럇여아림 사람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옮겨 가도록 촉구하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고로 그들을 치사(오만)칠십 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육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언약궤를 들여다보는 것은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침범하는 짓이므로 율법으로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민 4:5,6,20). 그러나 벧세메스 거민들은 이 법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원래 지성소에만 보관하며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 번만 들어가서 그것도 향의 연기 속에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오만)칠십 인을 죽이신지라.’에서 ‘수리아역과 아라비아 역본’에는 ’오만 칠십인‘이라고 되어 있고, ’갈대아 역‘에는 ’장로 칠십인과 일반인 오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70인 역에도 ’하나님이 오만 인과 칠십 인을 치셨다‘고 되어 있니다. 그러나 오만의 숫자가 기록된 것은 필사자의 실수로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당시 벧세메스 인구가 오만이 넘었을 것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시 죽은 벧세메스 사람의 수를 칠십 인으로 보는 데 타당성이 있습니다. 히브리 여러 사본들에 도 ’오만‘이라는 숫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그래서 우리 개역성경에도 ’오만‘을 괄호 안에 표기하고 있습니다.
20: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 21: 사자들을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내어 가로되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기럇여아림’은 ‘숲의 성읍’(시 132:6)이란 뜻입니다. 벧세메스 북동쪽 약 14km, 예루살렘 북서쪽 약 13km 지점에 위치합니다. 삼하 6:2에서는 ‘바알레 유다’로 불립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를 기럇여아림으로 보내려 한 데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첫째 아벡 전투 시(삼상 4장) 성소였던 실로도 파괴되었기 때문에 법궤를 돌려보낼 수 없었으며, 둘째 벧세메스에서 비교적 가까우면서도 벧세메스와 마찬가지로 블레셋의 판도 밖에 있던 곳이 기럇여아림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는 법궤를 블레셋 영향권 밖으로 옮겨서 저들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한 조치로 볼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내려와서’ 벧세메스와 기럇여아림의 지형적인 배경에서 나온 말입니다. 벧세메스는 해발 약 300m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기럇여아림은 해발 약 750m나 되었으므로 이러한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법궤는 여기서 20년간 보관되었다가 다윗에 의해 훗날 11키로미터 동쪽의 예루살렘으로 옮겨집니다.
결론)
오늘 본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잘 모르고 행함 일들이 종종 눈에 띄입니다. 그로 인해 심각한 불행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물론 벧세메스 사람들 조차도 알지 못하고 행하여 70인의 생명이 하나님의 재앙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는 하지만 잘 모르고 섬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기 위해 부지런히 성경을 배우고 익혀 행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도 행복을 누리는 최선의 방책입니다.
111419 안익선 목사/ 참조:행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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