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사람이 되신 사랑 (요1:14, 빌2:6-8)

호걸영웅 2019. 12. 29. 01:42

사람이 되신 사랑 (1:14, 2:6-8)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또는 형체

또는 보류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는 본체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서론)

1. 사랑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사랑을 ‘주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1:28). 그리고 2000년 전에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구세주로 주셨습니다. (9:6에서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라고 하신 2,800년 전의 예언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그리고 가장 귀한 것을 우리들에게 ‘주신’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는’ 것보다 더 귀하고 더 진하고 더 신비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되는’ 사랑입니다. 가장 귀하고 가장 진하고 가장 온전한 사랑은 ‘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아무나 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되고 부모가 되고 친구가 되는 사랑 그것도 놀라운 사랑입니다.

원래 사람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일수 밖엔 없기 때문에 ‘되는’ 사랑을 상상하거나 실천한다는것은 매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물론 성 프랜시스나 손양원 목사님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되는 사랑을 소망하셨기에 ‘되는’ 사랑을 실천하며 사셨습니다. 나환자들을 사랑한 나머지 나환자가 되고 싶어한 사랑이 바로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이 지녔던 ‘되는’ 사랑이었습니다. 어려운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의 목사가 되고 그들의 위로자와 돕는 자가 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나환자들의 피고름을 입으로 다 빨아내기 까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기의 양자로 삼아 먹이고 재우고 목사 되게 만드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별명이 붙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되는 사랑으로 나타난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요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아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깊이 알았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탄생 사건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한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은 인간들은 물론 천사들까지도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신비한 사랑이고 극치의 사랑입니다. (이제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본론)

첫째,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시므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7:14).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 속에 하나님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했습니다.

이사야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아기 예수님을 가리켜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아기 예수님 속에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실 때 갑자기 하늘에서 나타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족보를 따라서 태어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밀양 박씨로 안동 권씨로 김해 김씨로 인간의 족보를 따라서 태어난 것처럼아들 하나님도 인간의 족보를 따라서 태어나셨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족보를 길게 나열할 후 이렇게 결론을 지었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16).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소급해서 올라간 후 이렇게 마무리를 했습니다.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3:38).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 씨입니다. 고로 육신적으로 보아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아들 하나님께서 처녀 마리아의 아들로, 또 아기 예수로 태어나셨습니다. 마굿간에서 구유에 알몸으로 태어나 눕혀져 있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신 사실을 잘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못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은 신성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오직 동방 박사 세 사람 정도와 헤롯왕과 몇몇 신하와 들에서 양 치던 목자들 몇몇이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마리아와 요셉만 그 사실을 알았고 친척 몇 사람만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심으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놀라운 일이고 기절할 일이고 감격할 일이고 엎드려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사람으로서 사심으로써 사람이 되셨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를 가르켜“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는 말씀입니다.

잠깐 사람들에게 꿈이나 환상이나 천서처럼 잠깐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무려 33년 동안 사람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참된 사랑은 되는 것이고 함께 사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리운 손양원 목사님은 나병 환자들 수용소였던 애양원에서 나환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한국 선교사요 미국인 혈통인 존 린튼 박사는 한국 사람들을 사랑해서 한국에서 4대째로 태어나서 한국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존 린튼 박사는 한국 사람들보다도 더 분명한 한국 사람이 되었고 전라도 사람들보다 더 분명한 전라도 사람이 되었습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미국에 이민 가는 것을 좋아하고 사모하지만 존 린튼 박사는 자기더러 미국에 가서 살라고 할까 봐 걱정이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인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경상도 사람이었던 손양원 목사님이 전라도에 가서 전라도 사람으로 살다가 전라도 사람으로 죽었습니다. 경상도 사람이었던 주기철 목사님이 평안도에 가서 평안도 사람으로 살다가 평안도 사람으로 죽었습니다. 평안도 사람이었던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와 전라도에 가서 제주도와 전라도 사람으로 살다가 거기 사람으로 죽었습니다. 경상도 사람이 경상도 사람임을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전라도 사람이 전라도 사람임을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아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시고 사람들과 함께 울면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마르다 마리아와 함께 우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처럼 가난하게 사셨고 사람들처럼 피난살이도 했습니다. 인간의 배고픔과 인간의 아픔과 인간의 슬픔과 인간의 질병과 죽음의 고통을 모두 체험하며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사시므로 진정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엄청난 사랑의 사건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이고 기절할 일이고 감격할 일이고 엎드려 감사할 일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사람처럼 죽으시므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은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수명이 아무리 길어야 120년이라고 했습니다. 대부분 수명은 70이요 강건해야 80 정도라고 모세도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9:27)=“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엔 심판이 있다”했습니다. 죽는다고 끝이 아닙니다.

 

 그런데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본질 상 죽을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온 우주의 처음이요 끝이십니다. 예수님은 천지창조의 동역자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창조주 하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사람처럼 죽으셨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육신이 되신 아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사시다가 십자가에 달려서 사람처럼 죽으시는 모습을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19:34).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처럼 피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사람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극치입니다. 우리들의 저주 받은 사망과 심판의 운명을 100% 짊어지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극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람으로 사셨고 사람으로 죽으셨습니다. 최고의 사랑곧 가장 지극한 사랑은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 아들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집 한 채, 방 한 칸 없이 이 땅위에서 살으셨지만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도 우리 대신 거의 알몸으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17세기에 750곡의 찬송시를 쓴 영국 찬송작가이자 목사인 아이삭 왓츠(Isaac Watts, 1674~ 1748)는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라는 찬송시를 써서 부르며 감격하여 그 사랑을 노래하였습니다.
  

에화)시인 안도현이 지은 시 중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자신의 몸뚱아리 다 태우며 뜨끈뜨끈한 아랫목을 만들었던 / 저 연탄재를 누가 발로 함부로 찰 수 있는가? /자신의 목숨을 다 버리고 이제 하얀 껍데기만 남아있는 저 연탄재를 누가 함부로 발길질 할 수 있는가? / 나는 누구에게 진실로 뜨거운 사람이었던가? (이하 생략)//

그렇습니다. 연탄재도 누군가를 위해 온 몸을 태운 뜨거운 사랑, 되는 사랑의 상징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람으로 사셨고 사람으로 죽으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서 거의 알몸으로 죽으셨습니다. 이 사랑에 감복하여 울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사랑을 아직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되신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은 그 사랑을 몸에 지니고 그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고로 요한 사도는 요1: 14 에서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되는' 삶을 살고자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그는 고전9:19~22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중략)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라”
  사도 바울도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 되신 사랑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되는’ 것입니다
.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다른 종류의 존재가 ‘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무엇이 되시길 원하십니까? 섬김을 받는 자입니다. 섬기는 자입니까? 사랑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사랑 받으려고만 하는 자입니까?

 

성탄절을 맞으면서 ‘주는’ 사랑과 함께 ‘되는’ 사랑을 깊이 묵상하며,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 몸으로 조금씩이라도 드러내는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을 조금씩이라도 몸으로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심판을 이기는 길이요, 주님을 닮아가는 길이고 행복으로 다가서는 길입니다. 이 진정한 되는 사랑이 여러분의 삶에 조금씩이라도 채워지시기를 바랍니다.

 

121719 안익선 목사/ 참조: 김명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