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에스더 2장 강해(궁 안의 죄인들과 궁 밖의 의인 한 사람)

호걸영웅 2020. 10. 3. 22:55

에스더 2장 강해(궁 안의 죄인들과 궁 밖의 의인 한 사람)


서론)

모르드개라는 인물은 어쩌면 에스더서의 주인공인 에스더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에스더를 친딸처럼 양육했고, 왕후를 뽑는 자리에 에스더가 나아갔을 때 그녀가 해야 할 일을 지혜롭게 일러주었으며, 대적자 하만에 의해 유대인들이 몰살당할 위기를 맞았을 때 에스더가 정의롭게 행하도록 촉구한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2장의 주요 내용은 아하수에로 왕이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전국에 조서를 내린 뒤에 마음이 공허할 때에, 요즘말로 미인선발대회를 열어서 새로운 왕후를 선발하자는 신하들의 촉구가 전반부에 기록되었고, 에스더서의 공동 주연급인 모르드개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는 정도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록의 배경과 상황을 살펴보면 페르시아 제국의 겨울 왕궁인 수산궁 안에 있는 아하수에로 왕과 그의 신하들, 그리고 수산궁 밖에 있는 모르드개를 의도적으로 배치해서 대조합니다. 그렇다면 에스더 2장은 궁 안의 사람들과 궁 밖의 한 사람 모르드개를 어떻게 대조했는지 살펴보기로 합니다.

 

본론)

먼저, 수산궁 내에 있는 아하수에로 왕과 신하들의 기록을 보라. 왕후 와스디의 불경한 태도를 빌미삼아 조서를 내려 폐위했던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아하수에로 왕의 진노가 누그러지면서, 시간이 흐르자 다시 왕후 와스디가 그리웠던 것 같습니다. 와스디와 그녀가 행한 일, 그리고 조서를 내린 일을 생각했다는 기록 뒤에 바로 이어서 왕의 측근 신하들이 아리따운 처녀들을 전국에서 구하도록 종용한 상황을 보면 그 해석이 가장 합당합니다. 만일 폐위했던 와스디를 다시 왕후의 자리로 회복한다면 그녀를 폐위하자고 앞장섰던 신하들의 목이 달아날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앞의 제1장에서 므무간을 비롯한 일곱 지방관이 와스디의 버릇없는 행동에 대해 폐위를 주장하여 쫓아네게 했기애이제 신하들은 아하수에로가 와스디를 그리워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새 왕후 간택을 적극적으로 추진합니다. 그들이 새 왕후를 뽑자는 제안을 했던 이유는 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1장에서 와스디를 폐위시킨 이유도 그녀가 일부 신하들과 정적(政敵) 관계에 있었는데, 왕명을 거역한 그 일을 빌미로 아예 몰아내고자 작당한 게 틀림없다고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왕이 왕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할까봐 다른 새왕후 쪽으로 관심을 쏟게끔 하고자 새로운 왕후를 각처에서 선발하여 뽑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왕후를 선발하는 과정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도록 설명을 해 줍니다.

 

- 2:8 왕의 조서와 명령이 반포되매 처녀들이 도성 수산에 많이 모이게 함.

- 2:12 : 처녀마다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감(인터뷰?), 몸을 정결하게 하는 기한을 마치게 함.

- 2:14 : 저녁이면 갔다가 아침이면 둘째 후궁으로 돌아옴.

- 2:15 : 에스더도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감 등입니다.

 

당시 페르시아에서 왕후를 선발하려면 일차적으로 귀족 출신에서 뽑아야 했습니다. 후궁이나 첩이면 모를까, 왕후는 아무나 뽑지 않았죠. 같은 페르시아인 중에서도 귀족 가문에서 자란 여자여야 합당하 였습니다. 그런데 전국 각처에 공문을 돌려 어느 출신이나 인종, 신분과 관계없이 자원하거나 반강제로 끌어다 놓은 이유는 한 가지다. 오로지 왕의 마음을 채워주기 위해서다. 그래서 단순히 미인선발대회가 아니라 왕이 선발되어 온 여인들을 차례로 대면 면접을 하고 만족스러우면 다시 부르고, 불충분하면 그냥 둘째 후궁에서 왕이 호출할 때까지 대기해야만 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의 지방관들과 신하들은 정적 와스디를 폐위시킴으로써 정적을 제거하거나 원하던  목적을 달성하고, 와스디에게 더는 미련 두지 않도록 왕에게 이성적 만족함을 새롭게 제공하여 정신 팔리게 만들려던 그들의 계략은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본문 이후로 와스디는 이름조차도 언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권력이나 자신들의 안위에 방해가 된다고 왕후의 사소한 잘못에 과도한 죄를 뒤집어 씌어 폐위시킨 신하들, 그리고 아무리 왕이라지만 아꼈던 아내를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의 위신을 좀 실추시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쫓은 아하수에로 왕. 고로 수산 궁 안에 있던 사람들은 죄인의 탐욕이 얼마나 잔인하고 간사하며 더러운지를 여실히 나타내 주기도 합니다.

 

그에 반해 모르드개에 대한 행위의 소개는 단순해 보이지만  깊이 묵상하고 실천해야 할 교훈을 줍니다.

( 2:7) 그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었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고 했습니다.

유대식 본명이 하닷사’요 페르시아식 이름은 에스더’란은 여인과 관련하여 모르드개를 소개했는데, 부모 없이 자란 삼촌의 딸이자 사촌 여동생 에스더를 자기 딸 같이 양육했다 했습니다. 기록이니 별생각 없이 읽으면 무의미하게 지나칠 부분이지만, 당시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쉽지 않은 일이란 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이 포로들에게 관대한 포용정책을 썼다지만,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인들보다 절대 나을 리가 없고, 고된 일상만큼 많이 아파하고 눈물 흘리던 힘겨운 생활들을 해야만 했습니다.

( 137: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라고 한 것만으로도 그 포로의 삶들이 얼마나 힘겨움을 알 수 있습니다.

 

( 137:8~9)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한 만큼 잔인하고 무서운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이는 포로 생활이 매우 고단하고 서러웠음을 방증하는 시편의 고백입니다. 얼마나 그 생활이 고되고 원한에 사무쳤으면, 바벨론이 유다를 망하게 했던 것처럼 그들을 망하게 하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 기원했을까요?  게다가 바벨론 사람들의 어린 자녀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를 향해 축복하겠노 라는 내용은 참 끔찍하기 조차 합니다. 고통의 크기만큼 저주하는 심정을 담았던 시편입니다.

 

말 그대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살게 된 유대인들에게는 제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든 시대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남을 생각할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부지(扶支)하기 급급한 힘든 때에 타인을 배려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사촌 동생인 에스더를 양육했어요.

 

또 에스더 2장은 수산 궁 안에서 벌어지는 아하수에로 왕과 그의 신하들이 벌이는 거대하고 화려한

탐욕의 행진을 보여줍니다.

반짝이는 것이 다 금이 아니 듯, 거대하고 화려한 왕궁의 일이지만, 규모와 화려함은 추악한 탐욕을 가리는 가면이 될 뿐입니다.

신하들은 자기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음해하여 해치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왕은 자기의 만족을 위해 수많은 여자를 성적 쾌락의 도구로 삼는 일에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한 바사제국의 왕이며 주변 국가까지 정복하여 거대한 식민지를 다스리는 제국의 군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크고 화려한 제국의 우두머리였지만, 크고 화려하게 죄짓는 죄인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달랐습니다. 비록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의 후손으로서 삶의 무게를 고단하게 짊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외면하고 싶을 만큼 귀찮은 존재일 수 있는 고아 에스더를 도맡아 양육했습니다. 고단하고 비참한 포로의 후예이지만, 힘을 다해 한 사람 에스더의 생존과 성장을 도왔습니다.

 

굳이 책임질 필요 없는 어린 친척 여자아이 하나,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데리고 살아온 평범한 한 남자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행한 일이 민족의 구원을 이루었 습니다.

 

어쨌든 자기 권력에 심취하며 자기 즐거움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는 아하수에로 왕이나, 권력을 유지하고 자리를 보전하고 싶은 신하들의 간사한 계략이나 ……모든 것이 합하여 지면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여인 에스더를 왕후로 세워, 훗날 대학살의 위기를 맞은 유대민족을 구원하는 일군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이 에스더서가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 주권적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의 이야기를 통해 두 가지 커다란 영적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작정하신 뜻을 어쨌든? 이루십니다.

아하수에로와 신하들의 죄악이 하나님의 뜻을 막진 못했습니다. 세상이서 죄악과 불의가 아무리 강하고 넘실거려도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지녀야 할 믿음입니다!

 

포로로 잡혀 온 유대민족의 후예들은 포로기간 동안 상당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 믿음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고난의 세월에 묻혀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각박한 생활 가운데 도저히 느낄 수 없었던 때를 만났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머나먼 이국 땅과 이방 나라의 왕이 행하는 압정에도 넉넉하게 이루지고 있었음을 담담하게 제시해 줍니다.

 

그 곳에서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거대한 힘을 형성하고 제멋대로 행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결국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그 영광을 서서히 드러내신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에스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막을 것이 세상에는 없다! 반대로, 작고 적을지라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하는 한 사람을 통해 넉넉히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나타내 줍니다. 하나님은 많고 큰 것만을 사용하여 섭리하시는  분이 아니라, 작고 적어도 믿음 안에서 행하는 선함과 의로운 사람 하나를 더 기쁘게 사용하시고, 또한 그것을 통해 당신의 살아 계심과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이십니다. 죄악의 홍수가 넘쳐도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최후 승리에 대한 확신이며, 그 확신으로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의미와 용기를 얻어야만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선을 행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테니 아하수에로처럼 살아도 상관없다는 논리가 성립할까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그분의 주권과 통치 안에서 죄악도 선용(善用)하시기에 불의와 악을 저지르는 것조차 관대하실까요? 성경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런 논리라면 성경과 기독교의 핵심인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심판교리는 자취를 감춘 채 모호한 혼란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대적과 인간의 죄악을 허용하시긴 하지만, 죄를 부추기고 조장하고 관용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아하수에로의 권력욕과 간신들의 탐욕스런 간계를 허용하신 것이지,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그 일들을 부추기고 조장하는 일 따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탄의 대적과 미혹, 죄인의 악행조차도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섭리의 오묘함 앞에 도구가 될 뿐이지 , 하나님이 선히 쓰시니까 그런 죄악도 선하다는 생각은 심각한 오류입니다.

 

에스더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성도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시간 차이일 뿐, 하나님은 죄악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아하수에로처럼 높은 자리에 앉아 많은 사람을 상대하고 규모 있는 일을 맡은 엄청난 위치의 사람이라해서 죄악을 행하더라 도 무방하진 않습니다. 반대로 모르드개처럼 작은 자리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고 있으니 죄악을 저지른다고 무슨 큰 잘못이겠느냐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정죄해야 할 태도이고 심판받아서 마땅한 경우가 됩니다. 죄악을 밥 먹듯이, 노골적으로 저지르면서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시겠지.생각한다면 큰 오해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

모름지기 하나님의 사람은 모르드개처럼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성공을 이루고야 말리라는 야심이나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어떤 처지에 있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하수에로와 같이 큰일을 행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르드개처럼 비록 이름 없는 자리에서 사촌 여동생 에스더 같은 한 사람이라도 책임감을 가지고 양육하는 것 같은 의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아하수에로와 모르드개, 두 사람 중 누가 되고 싶은가요?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진실하게 대답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궁 안의 죄인들 틈바구니에라도 껴서 화려하고 고급지게 쾌락과 권력을 누리고 싶은 은밀한 욕심을 뿌리 뽑아야만 합니다.

092220 안익선 목사 / 참조:무화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