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Korean sermons)

삭개오의 감사 (누가복음 19:1-8)

호걸영웅 2021. 12. 19. 08:33

삭개오의 감사 (누가복음 19:1-8)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1.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2.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3.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서론)

한번은 가이드 포스트라는 신앙잡지에 <Pay a Pilgrim's Thank >라고 하는 제목으로 간단한 기사가 실렸었습니다. 거기에 하나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첫 해에 미국의 청교도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라는 제목입니다.

그들은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평안해서가 아닙니다. 성공해서도 아닙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여러분, 감사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감사, 감격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감격은 사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영과 자유와 무슨 형통함과 성공과 영광, 거기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병든 곳에 오히려 가난한 곳에 아주 절박한 곳에 그 고통 중에 진정한 감사가 있었습니다.

 

현재 한국의 소망교회 원로 목사이신 곽선희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종종 식탁에서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분이 음식을 먹을 때마다 자기 일생에 제일 음식에 대해 감사했던 때, 제일 큰 감사를 드렸을 때가 언제였나를 늘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밥투정은 안 하신답니다. 왜요? 그럴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그가 혼자서 남한으로 피난을 나왔을 때, 1951년 정월입니다. 너무 어렵고 춥고 배고프고 괴로운데 혼자서 지나가 다가 거기에 고구마 굽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군 고구마 냄새가 코에 싹 들어오니까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그래서 가지고 있던 그의 팔목시계를 풀어 주었습 니다. 당시는 돈은 별로 통하지 않는 때였습니다. 시계를 주고 고구마를 달라고 했더니 고구마 네 개를 주었답니 다. 요새 팔목 시계는 흔하지만 그 때는 온 동네에서 그 분밖에는 찰 수 있었 던 분이 없었데요.  그런데 이 귀중한 시계를 풀어주고 고구마 네 개를 손에 받아 들었고, 이제 서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데…… 눈물이 뚝뚝뚝 떨어지더랍니다.  그 때에 감사했던 그 마음은 일생동안 잊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아무리 좋은 음식 아무리 좋은 여건에 있어도 그 때의 그 감사에 비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옛날에 메리 플라워 호를 타고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신대륙 아메리카에 도착한 청교도들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저들은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 견디지 못했던가? 그들은 먼저 생존과 건강을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1620 12, 몹시 추운 겨울입니다. 그 길고 긴 항해 중에 백 열명으로 출발한 사람들이 괴혈병과 각종 바이러스 병으로  48명이 배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절반 정도만 살아 아메리카 대륙을 밟게 되었습니다. 살아남은 데 대한 감사. 그리고 건강을 지켜 주신 것에 대한 감사. 이것이 첫째 감사였습니다.

또한 의복과 거처가 문제입니다. 낯선 곳에 도착했는데 아무것도 도움될 만한 것들이 없는 거예요. 거기서 그들은 나무를 찍어서 오두막 통나무 집을 일곱 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통나무집에 들어가서 저들은 불을 피워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감사절입니다. 그 겨울에도 상당수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또 죽습니다.

 또한 봄이 되어 씨를 뿌려 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착한 Plymouth 라고 하는 곳은 토양에 모래가 주로 많아 저들이 가지고 온 종자 몇 가지, 그 중에 보리와 밀을 심어보았지 마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다행히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의 덕분으로 옥수수를 얼마간 추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옥수수와 얼마간의 농작물, 그리고 들에 뛰어 다니는 야생 칠면조를 잡아 그걸 구워 놓고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은 Thanksgiving 이 때쯤 되면은 어느 식당 어느 가정이든지 온통 칠면조 요리투성이가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다양한 요리로 만들어 먹어봐도 칠면조 고기는 별 맛은 없습니다.

 

곽선희 목사가 분이 미국에 갔을 때, 추수감사절이 되었습니다. 거기서 미국 학생들에게 "너희들 칠면조 맛있냐?" 라고 물어 봤더니, 학생들도 맛이 없다고 하더래요. "닭하고 칠면조, 어느 쪽이 맛있냐?" 고 여러 사람한테 물어 봤더니,  "아 그거야 닭이 맛있죠."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그럼 왜 칠면조를 먹느냐고 물으니, 우리 조상들이 이것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이고 그 전통을 따라서 그렇게 먹는 거라-고 했답니다. 이것은 결국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기념하여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감사가 어디에서 나옵니까? 가장 어렵고 절박한 바로 거기에서, 혹은 눈물을 흘리는 절박한 고난 중에 진실한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Courage to Be 라고 하는 그 유명한 책에서 이렇게 역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대인의 불행은 숙명과 죽음의 문제에서 왔다고 했어요.

 

대부분의 우리의 조상들도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어떤 고난도 이것이 우리  숙명이요, 운명이라고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운명에 저항할 생각을 못했어요. 그대로 그 많은 고생을 치르며 수 천년을 살아오게 됩니다.

 

중세기 사람들의 불행은 죄와 벌에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저주다. 죄에 내리시는 신의 저주다. 죄와 벌! 그 무서운 심판 앞에서 벌벌 떨면서 흑사병이 돌아도 저주다. 전염병이 돌아도 저주다. 홍수가 나도 저주다. 라며 살았대요.

 

현대인은 그 불행의 원인이 생의 무의미에서 비롯된다고 이 신학자는 또 말합니다. 무의미함입니다.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배고픈 것도 아니고 집이 없는 것도 아니예요. 왜 그렇게 걱정이 많습니까? 왜 그렇게 고독해 하는 것입니까? 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겁니까? 왜 감사가 없고 왜 감격이 없습니까? 끝없는 욕심 때문이요. 더 가지려는 마음이 너무 저 앞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것 가지고는 못 산다고 생각합니다. 또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신앙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고마운 마음도 감사한 마음도 그 고마움에 따르는 행복도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나타난 사람 삭개오는 특별한 감사를 드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은,우리가 잘 아는 얘기입니다만, 그는 여리고 성의 세리장(세무서장) 이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유대나라만 아니라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을 때입니다. 로마를 떠나서 살 수 없고 로마를 피해서 살수가 없어요. 로마 권력이 온 세계를 지배하는 때입니다.

 

바로 이런 때에 정치적 상황에서 대세를 잘 이용한 사람이요, 세상을 잘 요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세속적으로는 그는 세리의 장이요 권력자요 요새 말로 실세입니다. 그리고 부자입니다. 로마를 대표한 총독 이하 군인들도 이 세리장 같은 사람을 가장 귀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정치도 어렵습니다. 삭개오는 세상적 으로는 일단 성공한 사람이에요. ! 그런데 이 사람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는 종교적 고민입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등진 것 같은, 죄를 짓고 사는 것 같아요. 또 하나는 많은 유대인들이 반 민족주의자라고 그를 부르고 있습니다. 로마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까. 또 그리고 로마 사람의 힘을 빌어서 자기 권력과 자기 부를 취하고 있으니까 그 마음속에 갈등이 컸습니다. 민족을 배반한 고통, 윤리 도덕적인 왕따?가 된 피해의식이 있었어요.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의식이 팽배 했습니다. 어서 속히 메시아가 와서 새로운 질서, 새로운 평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그런 Messianic Expectation, 메시아 대망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박해가 어서 끝나길 대망했습니다. 삭개오라고 예외느 아니었습니다. 그러할 때 메시야 예수께서 그 삭개오의 마을에 오신 겁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예수님을 뵙고 싶은 꽤 강한 의지가 생겼습니다.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고 더 큰 세력을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당시 예수님은 좋지 못한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별명을 가진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열둘밖에 없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마태입니다. 세관에 앉은 현장에서 불러서 제자를 삼았어요. 도대체 어떻게해서 또 도대체 어떤 분이면 저렇게 온 유대 사람들이 다 천대하고 온 이스라엘이 미워하는 죄인의 대명사로 불리우던 세리 마태를 불러서 제자를 삼았단 말인가? 세리를 제자 삼은 그 사람이 누구냐? 세리의 친구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세리를 사랑한 그분이 누구신가 ? 라며 상당히 궁금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았어요.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밀어닥치는데…… 도저히 예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요. 그는 뭐 체면이고 뭐고 불구하고 돌무화과나무 (혹은 뽕나무)로 기어올라갔어요. 그리고 지나가는 일행 속에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셨나 보세요. "쳐다 보시고" 라 했어요. 얼굴과 얼굴, 눈과 눈이 마주치는 시간입니다. 이게 아주 소중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마음을 예수님이 읽으셨습니다. 왜 저 사람이 뽕나무에 올라갔는지, 왜 나를 애써 보려고 하는지, 그 마음을 예수님은 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마음을 다 알아주셨습니다.

 

그리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세리란 직업의 사람에겐 온 유대 사람이 상종하지도 잘 않고 인사하지도 잘 않고, 심지어는 거지도 세리의 돈은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더럽게 취급하는 세리의 집에 예수님은 오늘 밤 자고 갈란다! 라고 하십니다. 세리의 입장에선 이런 고마움과 감사가 어디 있습니까?

조선 시대에 있었던 이런 일화가 전해집니다. 난리가 나서 왕이 피난을 가게 됩니다. 변장을 하고 신하들과 같이 몰래 도망을 해서 어느 시골 촌부의 집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 촌부의 집에서 손님들이 누구신지는 몰르지만 ,점잖은 어른들이 몇일 지내겠다고 해서, 그대로 자세히 묻지도 않고 정성껏 참 잘 대접을 했더랍니다. 대접을 받고 왕은 난리의 상황이 바뀌어서 환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궁한 다음에 생각하니 그 촌부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 난리를 피하게 해 주었느니 말이요. 그래서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아 불러들이고 보니까 아이고, 그 촌부가 이서방?이라고 알았는데 이제 보니 지체 높은 왕이셨어요. 그 왕은 그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나를 이렇게 도와주었으니 무슨 소원이든지 말하게. 딱 하나의 소원을 들어주마. 뭐 땅이든 벼슬이든 뭐든지.라고 합니다. 그럴 때 이 촌부는 "아니에요. 저는 바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며칠 후에 제 환갑날이 되는데 애들과 함께 환갑 잔치를 하게 되는데 환갑잔치에 한 번 저희 집에 와 주시지요."라고 합니다.  이것을 왕이 거절하게 됐습니까? "그러지."라고 합니다. 왕이 촌부의 환갑 잔치에 오신다는 말을 동네 사람들이나 벼슬아치들이 듣고, 요새나 옛날이나 마찬가지로 얼마나 많은 뇌물이 들어왔는지! 그냥 금방 부자가 됐답니다.

 

왕이 우리 집에 한 번 오신다. 한 번 모신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것입니까? 내 신분이 달라지는 것이에요. 내 품격과 신분이 달라지는 것, 사람이 달라지는 순간이 되는 겁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 굉장한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그리고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느니라." 임마누엘의 축복입니다.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하십니다. 삭개오에게 완전한 의롭다 함을 얻는 엄청난 복을 내리십니다.

 

! 이제 삭개오의 감사가 무엇입니까? 삭개오는 바로 이 시간, 이 은혜 가운데서 첫째가 "즐거워했 다" 했어요. 기뻐해야 됩니다. 감사는 기뻐하는데 있는 거예요. 기쁨이 없는 감사란 감사가 아닙니다. 고맙다는 말도 억지로 하는 건 고맙다는 말이 아니겠죠. 감사, 기쁨, 그 기쁨 자체가 은혜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응답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물질을 얻었다는 것도 아니고 권세를 얻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집에 오신다는 것 그 자체 때문에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때문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감당못할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영접했 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대접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삭개오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마음이 열리면서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토색한 것(비겁하고 야비하게 세금을 중하게 걷은 것이나 속이고 가진 것)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들은 율법을 지키겠습니다, 선을 베풀겠습니다, 회개의 삶을 살겠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모신 자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참된 감사가 어디 있습니까? 원래 참된 감사는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Think, Thank 라는 말은 어원이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생각이 없으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어느 방향으로 생각하느냐,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감사하게 됩니다. 잃어버린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생각하고 내가 받은 것을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결론)

삭개오 같은, 아니 어쩌면 삭개오만도 못했던 우리를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하시고 우리의 낮고 천한 마음 속에 거하신 예수님의 은혜, 죄인을 용납하신 하나님의 은혜, 성령님의 은혜! 오늘 우린 더욱 감사해야 합니다. 금년 한해도 우릴 먹이시고 마시게 하시고 채우시고 돌보신 은혜! 일꾼 삼으신 은혜! 다시금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한 자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111521 안익선 목사/ 참조: 곽선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