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 전후서

디모데후서 2장 강해(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

호걸영웅 2022. 11. 10. 04:23

                 디모데후서 2 강해(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

찬송가 통일539, 493
서론)

디모데후서는 로마의 감옥에 갇인 사도 바울이 투르키예 지역의 에베소 교회에 있는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오늘 함께 보는 2장에서도 바울과 디모데의 상황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 편지의 정황들에 나타난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이 편지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서신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로마와 에베소는 도보와 해상으로 한 달 이상 걸리는 먼 거리로서, 디모데는 로마의 감옥에 있는 바울의 생존 여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바울은 1장에서처럼 2장에서도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라고 부르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본론)

)은혜 가운데서 강하게 복음을 가르치라 (1-2)
(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라 했죠?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처형될 수 있음을 예감하고 있는 상태라서 디모데를 내 아들이라고 부르며 아버지가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하기 위해 상속자를 부르듯, 디모데를 부릅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강하여질 것을 당부합니다. 상황적으로 바울은 체포되어 죽음을 앞두고 있고 많은 사람이 배신하고 떠났고 디모데 자신의 삶도 다소 불안정한 무리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 니다. 그 상황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수동태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 강하여 짐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일어난 구원의 은혜, 사명을 맡기신 예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강해지라고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을 열성적으로 전파시키라고 명령합니다.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충성된 사람들에게도 맡겨서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쳐 전파되게 하라고 권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에게 들은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박해를 당하는 혹독한 상황 속에서, 좀 융통성 있게 타협점을 찾고 싶은 마음이 디모데에게 있을 수 도 있었기에 더욱 간절히 당부하였습니다.

)예수의 좋은 병사로 고난을 받으라 (3-6)
(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바울은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병사라고 합니다. 주목할 것은 ‘병사’라고 하지만 그 강조점이 전쟁보다는 충성됨에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좋은 병사로 복음을 저버리지 말고 나와 함께 고난을 받자고 합니다.
아시아에서 많은 사람이 복음에 등을 돌렸으나, 디모데는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바울은 복음으로 인해 체포되어 처형을 앞두고 있는데, 너도 나와 같이 다른 모양일수도 있는 그런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제 바울은 디모데에게 더 구체적으로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합니다.
(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했어요.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한국 같이 징병제인 나라에서 군에 입대해 본 사람은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군에 입대해 있는 동안은 집도 떠나 고 연인도 만나지 못하고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따라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모병제라도 일단 군에 입대하면 군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도록 계약을 맺습니다.
당시 로마는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로써 스스로가 자처해서 군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고난은 스스로 복음을 위해 자처하는 고난입니다. 일상의 삶의 원리와 우선수위가 ‘복음을 따르는 것’이 되는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일꾼의 삶입니다.
그리고 다음 절들에서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고난 받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기뻐하시는지 말합니다. (5-6)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죠?

바울은 복음을 위해 왜 꼭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에 대해서 운동 경기를 예로 들어, 경기에서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무효가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축구에서 골을 아무리 많이 넣어도 업사이드면 무효가 되고, 육상 100m 달리기에서 1등을 해도 트랙 안쪽을 밟았으 면 무효입니다. 복음을 따르는 규칙은 복음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고난을 피하기 위해 상황에 따라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은 규칙을 어기는 것입니다.
또한 농부를 예로 들어, 농부가 농사로 수고하면 곡식을 얻는 마땅한 원리를 이야기합니다. 복음 그대로를 믿고 지키기 위해 고난을 받고 수고하면, 그 복음의 결과를 아름답고 풍성하게 얻을 수 있습니다.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다시 살 것이다 (7-13)
(7)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감옥에 있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고난을 받으라고 하는 것이 난데없어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은 복음의 원리에 의한 것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설명하며, 그것을 성도의 고난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랫 절에서 말하는 것을 유심히 생각보면, 하나님께서 복음과 고난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8) 예언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를 기억하라.
바울은 그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아담 때 부터 믿어 왔으며 구약성경이 가리키는 ‘다윗의 씨’,

메시아라고 말합니다.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지 않고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도 그와 같이 고난을 당하고 그도 마치 죄인처럼 붙잡히면서도 그 모든 것을 참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9=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듯이, 성도가 받는 고난도 고난으로 끝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9-10)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어요.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하고 있는 고난은 맹목적인 고난이 아닙니다. 그의 고난은 타인에게 구원과 은혜가 되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부활을 가져왔듯이, 바울의 고난으로 많은 성도에게 복음으로 구원이 성취됩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방해와 유대인들의 핍박 속에서 복음을 지켜냄으 로 써, 택한 받은 사람들에게 순전한 복음이 전해지게 했습니다.

)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되어 있다(11~13)

바울은 11절에서도 성도가 복음을 따름으로 받는 고난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되어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라 했죠.
그렇기 때문에, 복음에 따르는 고난은 죽음이 아닌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12-13)=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이제 디모데에게 그가 바울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무릅쓴다면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할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버리면 예수님도 그를 부인할 것을 말했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헛된 말들에 대해(14-19)

[14]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고 합니다.

좋은 복음의 일꾼들은 말다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다툼은 전혀 그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말다툼은 도리어 듣는 자들에게 오해를 주어 그들로 시험에 빠지게 하고 그들의 믿음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다툼은 오직 마귀가 기뻐할 뿐입니다.

[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했어요.

‘진리의 말씀’은 성경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종들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해야 합니다. ‘이는 바르게 해석한다’는 뜻이죠. 하나님의 진리의 바른 전달은 성경의 바른 해석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성경의 본문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거나 근거 없이 추측하며 해석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또 성경의 어떤 본문을 성경의 다른 곳들의 명백한 진리와 충돌하게 해석하는 것도 경계해야 하죠. 바울은 디모데가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함으로써 예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16-17] 망령되고[속되고, 불경건하고, 가치 없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괴저, canker(KJV), gangrene(NASB, NIV)]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고 했어요.

불경건하고 헛되고 무가치한 말들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습니다. ‘독한 창질’[괴저]은 몸의 한 부분이 썩어 다른 부분들까지 썩게 하고 마침내 뼈들까지 썩게 하는 무서운 병을 가리킨다. 그것을 조기에 발견해 조치하지 않으면 온 몸이 치명적인 병이 들게 됩니다. 불경건하고 헛된 말들은 이런 무서운 병과 같습니다. 이단들이 그러하죠. 교회가 이단에 대해 지혜롭고 진지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온 교회가 부패하고 세속화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단자들인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이름을 언급했습니다.

[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고 했죠.

불경건하고 헛된 말을 하는 자들의 문제는 진리에 관한 문제였는데 그들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고로 앞으로 부활은 없다는 식으로 성도들을 그릇 인도했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성경 진리를 부정합니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는 말하기 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중략)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의 부활 역사도 ‘신화’(saga) 혹은 ‘전설’(legend)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반대할 아무 이유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 ”고 하였습니다. 이런 것은 당연히 이단 사상입니다.

[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 안에서도 불경건하고 헛된 말들과 이단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완성되었 습니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성경의 근본 진리와 복음의 완성을 말하죠. 히브리서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고 했습니다.  

 

) 귀히 쓰는 그릇(20-26)

[20-21]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합니다.

‘큰 집’이나 부잣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도 있고 나무그릇과 질그릇 등이 많이 있습니다. 주인 밥상에 놓이는 밥그릇이나 국그릇은 비교적 좋은 그릇일 것입니다. 귀한 손님이 오면 사용하려고 보관해 놓은 더 값집 그릇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쓰레기통으로나 설거지 통 같은 것들도 있습니다. 주의 종들이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말과 같은 불신앙적 이단 사설이나 죄로부터 자신들을 깨끗하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귀히 쓰는 그릇들이 될 것입니다.

[2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주의 종들은 윤리적으로도 깨끗해야 합니다. 젊은 교역자들은 무엇보다 청년의 정욕에 휩쓸리기 쉽습니다. 특히 음행의 죄는 매우 치명적입니다. 성경에서 요셉은 그것에 대한 좋은 예이다. 창세기 39:10, 12,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23-24]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라 했죠?

 주의 종들이 소유해야 할 덕들이 있고 버려야 할 악들이 있는데, 주의 종들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들 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다툼이 나기 때문이죠. 본문은 주의 종에게 필요한 덕목으로 온유하고 다투지 않는 성품을 첨가하였습니다. 온유함은 주의 종에게 필요한 성품이죠. 주의 종들이 사사건건 사람들과 다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스라엘의 훌륭한 지도자 모세는 매우 온유한 자였습니다. 민수기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주의 종들은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는 자여야 합니다.  영혼들을 세우고 양육하는

일에는 많은 고통과 눈물과 지혜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25-26]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교훈, 훈계, 교정,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마귀에게 사로잡혀 그 뜻을 따랐던 저희로 깨어 그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실까 함이라-했어요. 주의 종들은 거역하는 자를 교훈하고 징계하되 온유함으로 교훈하고 징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혹시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여 진리를 알게 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결론)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 봅시다.

 1)첫째로, 하나님의 종들이나 평신도 지도자들은 교리적으로, 사상적, 윤리적, 교리적으로 깨끗해야 하고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강하여져서 복음으로 오는 고난들을 잘 참고 충성으로 견뎌야 합니다. 그 들은 신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잘 이해하고 믿고 그 말씀만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단사설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2)둘째로,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윤리적으로, 인격적으로도 깨끗해야 합니다. 그들은 육신의 정욕을 피하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구해야 합니다. 그들은 육신적 욕망의 죄에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3)셋째로, 하나님의 종들은 서로 다투지 말고 온유한 마음으로 교훈하며 징계해야 합니다. 거역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온유함으로 그를 교훈하고 교정하고 징계해야 합니다. 바른 사상, 바른 인격, 특히 온유한 성품--이것은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종들과 직분자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며 모든 평신도 지도자들이 힘써야 할 신앙생활의 목표이며 성화의 목표입니다.

 

 

101122 안익선 목사/참조: 조광묵 & 김효성 님

 

마침 찬송: 4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