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 전후서

디모데후서 4장 강해( 사도 바울이 엄히 명한 것들)

호걸영웅 2022. 11. 10. 04:25

디모데후서 4장 강해( 사도 바울이 엄히 명한 것들)

찬송가        ,        

서론)

디모데 후서는 사도 바울이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써서 보낸 편지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4장은 마지막 부분입니다.  특히 순교의 죽음을 예감한 절박한 시기에 보낸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유언서’, ‘바울의 신앙고백서’ 등으로 불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막상 앞두면 가장 진지해집니다. 인생에서 가장 진지한 순간이 그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서신은 단순한 격려와 권면의 차원을 뛰어넘는 명령에 가까운 유언서와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디모데에게 뿐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도 주신 참으로 진솔하고 간절한 당부의 말씀이라고 받아야 할 것입니다.

본론)

)1-2절은 말씀을 항상 힘써 선포할 것에 관한 엄숙한 명령입니다.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헬라어 성경으로는 1절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는 ‘엄히 명하노니’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말하 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꼭 지키라는 것입니다. 지금 말하는 것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은 그 내용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엄격한 명령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설명하면서, 그분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분이시고, 다시 나타나실 분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모든 살거나 죽은 자들에 대한 심판주가 곧 그리스도 예수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아래에 있다는 것은 그의 장차 있을 재림과 통치를 의미합니다.

 

예수 우리 주님 앞에 섰을 때는 과거를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서게 되는 그날을 의식하며 사는 것보다 더 성숙한 삶이 없고, 더 가치 있는 삶이 없습니다.

)엄히 명령한 교훈

(2a)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흔히 이 말씀은 복음 전파, 전도와 선교의 당위성에 대해서 말할 때 자주 언급됩니다. 그리고 이 부분의 말씀은 죽음을 목전에 둔 노령의 목회자가 아들과 같은 젊은 목회자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또한 3장에 는 말세에 있게 될 타락상과 거짓 교사들의 실상과 최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래서 “너는 항상 말씀을 전파하기 힘쓰라”라며 목회자로서의 복음 전파의 중요성을 항상 기억하라 고 했습니다.


(2b)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경책(警責)하다’는 ‘정신을 차리도록 꾸짖다’인데, 누군가가 비성경적 삶을 살고 비복음적 삶을 살때 그가 깨닫도록 책망하라는 뜻입니다. ‘경계(警戒)하다’는 ‘뜻밖의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여 단속하다’인데, 성경에서는 주로 ‘야단을 치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렇게 보면 ‘경책하다’와 ‘경계하다’는 전도하는 것과 아울러 설교나 심방 등을 통해 교정하고 바로잡으라 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3-5)= 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념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라 했습니다.

말씀을 근면 성실하게 전파해야 하는 이유는 악한 때가 이를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때는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때’입니다. 사람들은 ‘바른 교훈’, ‘건전한 교훈’보다 ‘호기심을 끄는 교훈’, ‘욕망이나 쾌락을 만족시키는 말씀’에 관심을 더 기울이고 이끌립니다.
그래서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는 시대’라고 합니다. 즉 자신의 욕망을 지지해 주는 사람이나 그 무엇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습니다.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했죠.


사람들이 진리를 떠나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는 시대’라고 합니다. ‘허탄한 이야기’는 디모데전서에서는 ‘신화’라고 번역했습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듣는 것보다 ‘허탄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진리는 밋밋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밋밋하게 보이고, 단순한 진리나 교훈이 우리의 인생을 바꿉니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란 책이 한때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유치원에서는 심오한 철학을 배우는 것도 아니고, 복잡한 수학 공식을 배우는 것도 아니며, 세상 경제 체계를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무엇이든지 나누어 가져라”, “다른 사람을 때리지 말라”, “사용한 물건은 제자리에 놓으라”, “내 것이 아니면 가져가지 말라”와 같은 기본적 교훈을 배웁니다. 그러나 그것이 살아가면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종종하는 말 중의 하나는 “인사만 잘해도 존중받는다”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입으로만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들의 삶이 진리 위에 있고, 그 삶이 거룩하며 복음적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비도덕적이고 비성경 적인 삶의 유혹이 사람들을 더 유혹합니다. 하나님이 없고 사후세계도 없고 지옥 천국 부활도 없으니 지금 현재를 엔조이해야 하고 과학을 숭배하야 한다는 가르침을 많이 따릅니다. 그리고 성경말씀보다 인권이 더 중요하다는 등의 주장을 일 삼습니다. 그래서 동성결혼이 합법화 되기도 합니다.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5절은 ‘그러나 너는 ’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너 자신의 삶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5절에서 가장 강조하는 단어가 ‘너는’입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다 나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 ‘신중하다’는 ‘술에 취하지 않다’입니다. 술은 단지 마시는 액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의 총체를 대표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일은 구호를 외치거나 캠페인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일상생활 중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맡은 일을 잘 감당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
유언처럼 남긴 바울의 신앙고백(6-8)
6-8절은 죽음을 목전에 둔 바울의 유언적 신앙고백과 승리 선언에 대해 증거합니다.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 했습니다.


‘전제(奠祭_drink or pouring offering)’는 번제, 화목제, 속죄제 등에서 희생제물을 태워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불에 타고 있는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부어서 그 향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 땅에서 순교로 마침표를 찍게 될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 각자에게도 ‘떠날 시각’이 있습니다. 자신의 떠날 시각이 언제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그 시각(時刻)이 없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 시각은 1절의 표현으로 하면, ‘우리를 심판하실(셈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서게 되는 때’입니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바울은 자신의 지나온 삶이 ‘선한 싸움’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가 필요없다는 사람에게 그분이 구세주인 것을 일깨워 주고,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사람에게 그 생명을 소유하도록 구원으로 인도하는 싸움입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왜 부모는 자식을 이길 수 없을까요? 힘이 없어서겠 습니까? 경제력이 없어서겠습니까? 지식이 모자라서겠습니까? 모두 아닙니다.

부모가 나이가 들어서 정말 힘이 없어지고, 자식이 부모보다 훨씬 부유하고, 자식이 훨씬 많이 배운 상태가 되면, 그때는 사실 자식이 부모에게 져줍니다. 부모가 자식을 이길 수 없는 것은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싸우고, 자식은 자신을 위해서 싸우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선한 싸움을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러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끝까지 달리는 것, 즉 끝까지 싸우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도중에 선한 싸움을 포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합니다. 자신의 인생 마라톤을 모두 완주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바울 사도가 믿음을 지키는 일은 당시에는 너무나도 어려웠습니다. 마지막 때엔 많은 동료들이나 제자들이 그를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누가만 자기 곁에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네로라고 하는 로마 황제의 핍박은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고독감과 허탈한, 실망감, 배신감으로 그의 감옥살이는 더욱 더 뼈 속 깊이 느껴지는 추위가 사라지지 않고 스며 들어 왔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7절의 고백을 하는 바울은 참 복됩니다.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고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선한 싸움이나 경주를 마치면 반드시 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해 봅니다. 바울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오늘 본문과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다메 섹으로 가던 그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나 주신 후에, 그가 그의 생애를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17절에서 고백처럼, 주 예수께서 그의 곁에 서서 그에게 힘을 주셨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특히 사랑하고 아끼며 함께했던 디도(그레데 섬의 목회자,디도서의 수신자)조차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케도냐의 남부인 달마디아로 가버렸다고 합니다. 오직 누가만 그의 곁에 남았습니다.

우리의 남은 믿음의 경주나 싸움에서도 바울보다 나으리아고 믿어선 안됩니다.혹 바울처럼 어려운 경주라 할 지라도 바울의 믿음을 본받아 선한 마음으로 우리의 달려갈 길을 신실하게 달리며, 끝까지 달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 곁에서 힘을 주시는 것을 더욱 경험하시게 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지금까지 얼마의 인생을 살았든, 또 우리의 남은 인생의 길이가 얼마이든, 우리가 이 땅에서 허락하신 마지막 숨을 내어 쉰 후에는 우리의 삶을 결산하고 셈하실 주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욕망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주님을 참된 스승 삼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인생길에 등불과 지팡이와 막대기 되심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선한 싸움을 싸워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102522 안익선 목사/ 참조:
정한조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