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잠언 24장 강해(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말고 지혜를 좇으라)

호걸영웅 2022. 11. 10. 04:33

잠언 24장 강해(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말고 지혜를 좇으라)

통일 찬송가 433,434

서론)
본문 잠 24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말고 지혜를 좇으라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본론)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 말라(1-10)
(1-2)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고 했어요.

악한 사람들이 잘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지도 말라고 합니다. 그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파괴한다고 합니다.
‘악한 사람’은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 윤리적, 도덕적으로 낮은 수준의 삶을 사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 하나님께 등을 돌려,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을 두로 지칭합니다.

 

‘부러워하면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은 단지 그 사람들에게 진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부러워하면 “저 사람도 하는데 나는 왜 못해?”라고 생각하며 따라하게 되면서, 자신도 악한 사람이 되고야 맙니다. 그래서 부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악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아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또 있습니다. (19-20)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고 합니다.


그들이 가는 길은 결국은 멸망의 길입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쌓은 것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이 땅에서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필귀정(事必歸正)’입 니다. 그들의 영혼은 영멸하고 의인의 영혼은 영생합니다.

(3-4)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고 하십니다.


‘집’은 ‘건물’을 뜻하기도 하고, ‘가정’, ‘국가’,인생전반을 뜻합니다. 그리고 ‘지혜’와 ‘명철’, ‘지식’은 모두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집을 짓는데 처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설계’입니다. 좋은 집일수록, 큰 집일수록, 높은 집일수록 설계가 좋아야 합니다. 설계가 좋지 않거나 없으면, 제대로 된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설계가 제대로 되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설계여야 합니다.

 

또 집은 지혜와 명철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견고하게 된다’고 하고, 방들은 채우게(채워지게)  된다고 모두 수동태로 표현합니다. 가정과 국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에 비바람이 불어대고, 눈보라가 휘몰아칠 때, 더욱이 인생에 지진이나 사망이나 전쟁이 일어나도 버틸 수 있습니다.  

)자비의 삶을 살라
(11-22)
(11-12)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와 ‘살륙을 당하게 된 자’는 모두 ‘복수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죽을 죄를 지어서 끌러가는 사람이 아니라 무고함에도 유죄판결을 받았거나, 억울하게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건져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에 병자들을 고치자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라도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지는 것이 당연하듯, 안식일일지라도 사람을 살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혹 외면하는 일이 있다면, 행위대로 갚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상선벌악’, 선을 행하면 상을 주고, 악을 행하면 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3-14)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
지혜와 명철인 하나님의 말씀을 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송이꿀’은 ‘최고 품질의 꿀’을 의미하 기도 하고, ‘벌집에 고인 진짜 꿀’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에 좋을 뿐 아니라 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영원한 단맛, 곧 능력과 행복이 있습니다.

(21-22)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더불어 사귀지 말라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그 둘의 멸망을 누가 알랴

하나님과 왕을 나란히 세우며, 경외해야 함을 말씀하는 것은 그 왕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합당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보이는 왕을 바르게 섬기는 사람은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도 바르게 섬기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 줍니다. 고로 이런 경우엔 반역자와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지혜 있는 사람?의 잠언들(23-34)
22:17-24:34의 잠언은 저자의 이름이 불분명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23절이 “이것도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이라”로 시작됩니다.

(23) 이것도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여기서는 공정한 재판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만약 악한 사람(죄인)을 옳다고 하면 백성들로부터 저주와 미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즉 재판을 할 때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도 안 되고, ‘안면무죄 생면유죄’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법은 법이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을 지켜주기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26)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적당하다’의 원어에 의미는 ‘모자라지도 않고, 남지도 않는 알맞다 ’인데, 본문의 ‘적당’은 ‘올바름’, ‘공정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입맞춤’은 친밀함의 표현입니다. 서양에서는 친밀함의 표현으로 볼을 맞추는데, 그것과 유사합니다. 표준새번역성경과 공동번역성경은 26절을 ‘바른 말을 해 주는 것이 참된 우정이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언어에 진실함과 올바름 을 담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나태하지 말라

 

30-34절은 게으르고 나태한 자에 대한 경고입니다.
(30-34)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 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화장실을 보면 그 집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화장실’이 감추어진 곳, 드러나지 않는 곳을 정리를 하면 드러나는 곳은 당연하게 정리를 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다른 곳은 정리가 되었음에도 화장실이 정리가 되지 않은 집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지혜자는 화장실보다 더 그 사람과 집을 알 수 있는 부분을 말합니다. 그것은 ‘밭’과 ‘포도원’입니다. 밭과 포도원은 농부에게 생명과 같은 곳이고, 관심과 정성의 초점이 되는 곳입니다. 그곳들이 가시덤불과 거친 풀(찔레)이 가득하고, 돌담이 무너져 있다면 들어가 돌보기도 힘든 상태인 밭, 완전히 황폐화된 밭을 의미합니다.  것을 보고서 지혜자의 생각이 깊어 졌고, 훈계를 받았던 것입니다. 지혜 없고, 게으른 농부의 밭을 보며, 자신(지혜자)의 삶을 비교 투영해 본 것입니다.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타산지석으로, 반면교사로 삼은 것입니다. (참고로 두 한자숙어를 비교해 봅니다. 주로 사례가 좋은 경우일 때면 “타산지석으로 삼자”라 하며, 부정적인 것일 때는 “나는 저렇게 안되야지” 라는 뜻으로 ‘반면교사’ (反面敎師)가 사용되는 차이)

 

33절에는 ‘좀 더’라는 말이 3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조금식 미루다 보면 일들이 태산이 디어 버립니다. 시인 바이런(G. G. Byron)이 말한,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갑자기 유명해졌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점이 아니라 선으로 이어집니다. 즉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나의 삶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미래의 나’는 오늘의 삶의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결론)

악한 사람이 형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들보다 더 형통하게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명철, 지식으로 집을 짓고, 꿀과 같은 말씀을 먹어야 하는 것도 그것을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게으르고 지혜 없는 사람의 모습이 우리 모습이 아니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101322 안익선 목사 / 참조:정한조 님

 

*마침 찬송; 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