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히브리서 2장 강해(표류하지 않는 신앙을 갖으라)

호걸영웅 2022. 12. 18. 00:18

히브리서 2장 강해(표류하지 않는 신앙을 갖으라)

서론)

히브리서 2장은 그리스도의 우월성 대해 천사 및 대제사장 등에 비교하여 설명해 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론)

)표류시켜선 안 될 믿음

1.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함으로써 믿음에서 표류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1).

즉 믿음에 견고히 서는 길은 ‘들은 것, 곧 복음의 모든 진리를 더욱 붙잡고 그것을 더욱 쉬임없이 주목하는 것이죠.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이라는 말은 목적지 없이 그냥 떠내려감으로써 정박할 곳을 놓쳐버리는 배나 물건 따위를 묘사하거나 또는 손가락에서 빠져버린 반지 혹은 깨진 항아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묘사하는데 사용되는 말입니다.

위대한 복음의 진리라 해도 이와 같이 놓쳐버릴 가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고로 말씀에 고정되거나 헌신하지 않는다면 다른 물살에 휩쓸려 무한한 가치를 잃어버릴 수 있고 또 실제로 복음에서 떠난 멏몇 형제들의 이름이 다른 서신서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들은 것’(복음의 진리)을 마음에 깊이 그리고 굳게 간직하려는 노력과 믿음이 실천되어야 합니다. (지붕의 슁글 Shingle,덮판 경우-, 접착제, 접착 테잎,다른 슁글과 연결)

2. 2절은 천사에 대한 언급이 중복됩니다.또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은 천사의 중보를 통해 받은 것이라고 유대인들은 이해했고 신약의 저자들에게서도 이것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3:19; 7:53).

바울은?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공정한 처벌을 받았다면, 하물며 천사보다 너무나 우월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전해주신 ‘이같이 큰 구원’의 복음을 경멸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라고 반문합니다.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transgression and disobedience)’에서 전자는 선을 넘어가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는 것을 말합니다(2).

, 전자는 지나친 범죄(an overt sin of commission)이고 후자는 소극적 범죄(a sin of omission)로 봅니다.

너무나 중요한 구원의 복음의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다양한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여 주신 것이죠. 우리는 이 말씀 앞에 합당한 반응-순종-을 보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메시지에 헌신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직접 예수님이 전하는 메시지를 들은 사람은 아니었기에(‘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혹은  3). 그와 독자(편지를 읽는 자)들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그 말씀에 헌신하여 확증하여 준 것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진실성은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들의 증언에만 의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직접 표적과 기사 그리고 여러 선지자와 예언들로 그 말씀을 확증하셨다 했습니다(4). 또 이런 것들이 예수님의 공생애와 사역 등에서, 그리고 사도들의 기적과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나타난 일들이었습니다. 고로 이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 오는 세상은 다 그리스도께 속한 것(5~13).

당시 쿰란(사해 근처 쿰란 광야 산악 지대에 살며 성경을 기록하던 매우 경건한 유대인 집단) 종파 유대인들은 두 명의 메시아적 인물 즉 왕과 제사장의 역할을 각각 맡게 될 인물들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 둘은 모두 종국에는 천사장 미가엘의 권위에 종속할 것이라고 주로 믿었다고 합니다.

, ‘장차 오는 세상’(5)은 결국 천사들의 권위에 종속하게 된다는 신앙적 관점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정면으로 이 사상을 반박하면서 장차 세상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만 종속할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장차 올 세상’은 무엇인가? 그 세상은 성격상 1:2의 ‘이 모든 날 마지막’과 같은 것이죠. 물론 미래에 속한 것이지만, 그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즉 그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완전히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구원의 시대, 교회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죠. 아들 하나님 예수께서는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분(an inaugurator)이십니다.

고로 구원의 새 시대를 여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와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17)고 합니다. 너무나 놀라운 은혜입니다.

17.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고 했죠.

결국 히브리서 기자는 천사보다 우월하시지만 잠시 천사보다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좌절과 고난으로 위협받는 우리의 인성을 짊어지실 것임을 바울은 시편 8편을 인용하여 설명해 준 것입니다.

 

9절도‘예수를 보니’라는 부분은 시편 인용의 절정입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했어요.

 

주님은 인성을 입으셨으나 죄와 반항의 특성을 가지지 않으셨으되 우리의 고난은 취하심으 로써 고난으로 허우적대는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여 아셨다고 합니다. 주님은 죽음을 맛보셨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가장 비참한 상태까지 경험하셨습니다(9). 동고동락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의 선구자가 되심으로 그를 아는 자들로 두려움을 이기게 하셨죠.

) 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한 설명(10).

10절은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구원의 창시자가 되실 충분한 자격을 얻으셨는데, 구원의 길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온전함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온전함, 곧 ‘성화’ (Santification)는 히브리서의 주요 주제 중 하나입니다(10:14,29; 13:12).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거룩 즉 성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화에 대한 추가적 설명; 그러므로 성화는 영어로 Synergism(추가적 요소)이 됩니다. 헬라어 순(함께), 에르고(일하다)라는 두가지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용어가 Synergism (합력사역)입니다. 성화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합니다.

 

1.   성화의 소극적 측면은 죄를 죽이고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죄 죽이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화의 과정에서 죄 죽이기를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서 강조했 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육신에 빚을 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 8:12-13) 성도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안에 있는 죄성을 죽여야, 즉 힘을 못 쓰게 만들어야 성화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죄 죽이기는 나그네 인생길에 승리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라고 언급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2:11)

2. 성화의 적극적인 측면은 성화의 목표입니다. 성도들은 어디까지 성화 되어야 하는가? 성화의 목표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데에 이릅니다

=[출처] 13장 성화에 관하여(1689년 런던 침례교 신앙고백서)|작성자 정우민

 

그리고 우리는 정결케 되었을 뿐 아니라(1:3) 이제 그분과 함께 온전히 거룩해지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를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셨고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으 며, 함께 하나님의 집에서 나누는 교제를 바라보며 기뻐하셨습니다(11~12). 우리는 황송하게 도 그리스도의 형제요, 자녀가 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은혜와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13).

) 우리의 해방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14~18).

이제 14절부터는 그리스도는 사망으로 사망을 이기시고 마귀를 정복하사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들을 그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시켜주셨다고 합니다(14~15).

성도는 이 은혜를 삶에서 누려야 합니다.

 

어떤 이의 신앙적 고백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죽기를 꺼려하는 이는 충분히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아직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했으며, 이 세상을 장차 올 세상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기꺼이 죽을 수 없는 이가 그리스도인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고 또 자비를 나타내심으로써,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자비하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으로서 백성의 죄를 구속해주셨습니 다(17). 그는 우리를 향하여 자비하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충성되십니다. 이것이 사람과 하나님을 향한 제사장 사역의 온전한 양면적 역할입니다.

결론)

예수께선 우리와 같이 시험을 당하시고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시험 받는 우리 연약한 인간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18). 그는 능하신 분이십니다. 고로 우리는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매일의 유혹과 위험 속에서 이런 그리스도를 날마다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으십니까? 당신은 주께서 주신 복음의 모든 진리를 더욱 붙잡음으로써 신앙의 표류를 잘 막아내고 잘 견디고? 계십니까? 이 큰 구원을 등한히 혹은 소홀히 여기는 큰 어리석음을 법해선 아니 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121322 안익선 목사/ 참고: 김형익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