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히브리서 12장 강해(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호걸영웅 2023. 4. 8. 01:42

히브리서 12장 강해(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서론)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힘쓰며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징계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생자에게는 징계가 없지만 참 아들에게는 징계가 있습니다. 잘못된 길로 가면 하나님은 징계를 하십니다. 우리에게 징계가 있다면 참 아들(자녀)이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고 돌아서야만 합니다.

 

본론)

)1-4, 믿음의 경주를 하라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했죠?

 

 1, 2절에서 주동사는 ‘경주하자’입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믿음의 선진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들에겐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걸쳐 지금도 수없이 많은 증인들이 있으므로(경기장에 숱한 관중과 응원단들이 있으니) 때때로 고난 중에 외로워 보이는 이 길은 알고 보면 실상은 결코 외로운 길이 아니죠.

 

또 우리(경주자, 선수)는 믿음의 경주를 할 때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해요. 달리기 경주자는 가벼운 복장을 하고 경기에 임합니다. 신앙의 경주도 동일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이란 온갖 종류의 세상 염려들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의식주에 대한 염려, 돈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가정이나 미래에 대한 염려 등을 포함해요.

 

얽매이기 쉬운 죄들은 불신,형제에 대한 미움과 시기, 거짓과 탐욕, 음란 등의 죄악들을 포함해요. 우리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신앙의 경주를 잘 하고 믿음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또 신앙의 경주에는 인내도 필요하죠.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성도의 경건생 활도 하나의 훈련 과정이며 거기에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물론 금욕주의는 잘못된 사상이지만, 절제와 인내 자체는 소중하고 귀한 덕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는 즐거움과 결혼과 가정이라는 즐거움을 주셨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며, 그것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이지만( 5:18; 9:9), 신앙생활에는 절제와 극기와 인내도 상당히 요구됩니다. 그래서 본서신의 앞부분에서 이미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씀했었죠( 10:36).

결국 신앙생활은 달리기 경주와 같아요.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야 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상을 예비하시고 우리의 신앙 경주를 격려하시죠. 열심히 달려가는 자들은 좋은 상을 얻을 것입니다.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 라.= ‘믿음의 주(아르케곤)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텔레이오텐)’라는 원어는 ‘믿음의 시작자요 완성자이신 이’라는 뜻이죠(KJV, NASB, NIV).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믿음을 시작시키시고 완성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행하신 아름다운 일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가 온전케 하실 것이죠.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친히 모범을 보이셨죠. 그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란 그가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게 되실 일을 가리킵니다. 인간적으로 말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상급이었죠. 주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 또 그가 십자가를 지기 위해 받으신 부끄러움은 얼마나 많았는가? 그는 악인들에게 비난의 말들을 들으셨고 침 뱉음과 매맞음을 당하셨으며 벌거벗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음을 당하셨어요. 이런 예수를 바라 보라 했습니다.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예수께서는 당시의 악하고 위선적인 유대 지도자들에게서 미움을 받고 정죄를 받으셨고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피흘려 죽으셨죠. 히브리 교인들이 당한 고난이 심각한 부분도 있긴 하지만 십자가 달리신 예수 정도는 결코 아님을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고로 능히 인내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5-13, 하나님의 징계하심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징계하심’이라는 원어(파이데이아)는 징계함을 포함하여 사람에 대한 전인격적 교육과 훈련을 나타냅니다( 6:4).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나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의 징계하심에 대해 성도는 경히 여기지도 말고 낙심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해야 하며 그의 책망하심과 징계하심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매를 경히 여기고 무시하는 것은 완악하고 패역한 마음이며( 1:5)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에게 어떻게 하실 지 심히 두려울 뿐이라 했어요.

[6-8] [이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채찍질하심이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들을 징계하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미워하시는 자들에 대해서는 징계하지 않고 버려두시고 무관심하실 것입니다. 버려 두심과 무관심은 징계보다 훨씬 더 불행한 일이라 했어요.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질은 우리에 대한 그의 관심과 자녀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해요.

)14-17, 화평과 거룩함을 좇으라

[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하나님의 뜻은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죠( 13:34).

로마서 12:18에서,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했죠.

 

또 거룩함도 하나님의 뜻이죠(살전 4:3, 7).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으로 이미 시작되었으나(고전 1:30; 10:10, 14). 이제 법적으로 완성된 이 거룩은 실제적으로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15-17]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람이 있죠.

 1)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구원의 은혜를 선포하셨지만, 그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있어요. 은혜를 받은 표는 회개와 믿음과 순종입니다. 그러나 그런 표가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2)둘째는 ‘쓴 뿌리’입니다. 쓴 뿌리는 이단사상이나 도덕적인 악을 조장하며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들이죠.

3)셋째는 음행하는 자예요. 음행 곧 성적 부도덕은 인간의 불결과 더러움의 대표적 죄악이죠. 4)넷째는 망령된 자입니다. ‘망령된 자’라는 원어(베벨로스)는 ‘속된 자, 불경건한 자’라는 뜻이죠.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장자의 특권을 동생에게 팥죽 한 그릇에 팔았던 에서와 같은 자들입니다.

 

)18-29,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거절하지 말라

[18-21] [이는]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黑雲)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아님이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 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이 본문은 우리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며 서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와 쓴 뿌리와 음행하는 자와 속된 자가 없도록 해야 할 이유를 보입니다. 그 이유는 너희가 시내산에 이른 것이 아니고 천국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와 같이 본문은 시내산(율법)과 천국(영생의 복음)을 대조해요.

 

출애굽기 19:16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 시내산에 도달했을 때의 광경을 증거하기를, “제3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라고 하였죠. 이스라엘 백성은 불붙는 산과 캄캄한 구름과 어두움과 번개와 천둥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친 음성으로 율법을 받았어요. 그들은 거기에서 짐승이라도 산에 오르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었고 모든 백성은 다 심히 두려워 하며 떨었었습니다.

 

[22-24]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 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더 위대하고 더 훌륭한) 말하는 뿌린 피(예수의 보혈)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대조하여, 신약 성도들은 시내산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으로 나아가죠. 시내산과 천국은 현저하게 차이가 납니다. 시내산의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었죠. 그러나 천국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씻음과 의와 영생과 평강이 있는 곳입니다. 고로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5-27]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하나님]를 거역하지 말라. (시내산)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그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재림과 심판)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신약 성도들은 구약 성도들보다 더 놀랍고 더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며 더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위엄 중에 말씀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도 성령의 역사로, 목자들을 통해 계속적으로 들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거부하거나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며 믿고 진지하게, 성실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결론부)[28-29]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천국)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심판의 주)이심이니라.=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치 말고 그 말씀을 믿고 그의 은혜를 받아들여야 합니 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주시는 구원의 은혜요 천국과 영생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회개 자복하여 주 예수를 마음 깊이 환영하고 그 앞에 절대적인 순종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030223 안익선 목사/참조; 복음 빵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