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전후서

베드로 전서 5장 강해 ( 교회 장로들과 회중들에 대한 권고)

호걸영웅 2023. 7. 11. 08:36

베드로 전서 5장 강해 ( 교회 장로들과 회중들에 대한 권고)


서론)

베드로전서의 마지막 부분을 이제 우리가 배우게 되었습니다. 4장에서는 흩어진 나그네의 삶을 세상 가운데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음으로 살아가라 라고 권고하고,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때를 근신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힘주어 말씀하던 베드로는, 이제 장로들과 젊은이들, 그리고 회중들에게 각각 필요한 믿음생활의 중요한 부분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단락구분은 4단락입니다.

 

1) 장로들에 대한 권고(1~4), 2) 젊은이들에게 대한 권면(5), 3) 회중에 대한 권고(6~10), 4) 마지막 문안인사(11~14) 등입니다.

 

본론)

 

) 장로들에 대한 권고(1~4)

 베드로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한 자로서 장로들을 권면하며 교훈합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사도로 높혀서 다른 사람을 훈계하고자 하는 자세보다 자신도 유대교회적 상황이나 입장에서는 역시 자신 또한 장로임을 내세우며 초대교회 지도자들과 눈높이를 같이 하려 하였습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된 사람들은 교회의 다른 일꾼과 나는 다르다는 의식을 보여주러 하기 보다는, 믿음의 동역자 의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눈높이에 맞춰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 위에 자신을 드러내어 자신을 낮추심 으로 진정한 섬김의 리더십을 보이신 것 같이, 사도들이 일반적 교회의 장로들처럼 그들의 입장이 되어질 때, 그들의 태도는 더욱 달라질 것이라고 봅니다. (삼성의 이재용 사장이 직원 급식소에서 동일하게 같은 메뉴로 식사하고 대화하듯)

 

고로 좋은 영적 지도자들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고난의 증인과 영광에 참예 할 자로 밝힐 수 있겠는 가? 영광을 바라보지만 고난을 알지 못하는 자는 아닌가? 주님의 마시는 잔에 동참하고 있는가? 라는 점도 다시금 그리고 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어 베드로는 장로들이 양무리를 칠 때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점을 지적해 말하고 있습니다. 즉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라는 것이죠.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양무리 의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선 게네사렛(갈릴리) 호수가에서 ‘내 양을 치라 ’는 주의 음성을 들은 베드로를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께선 주님을 사랑한다는 베드로의 그 고백위에 주님의 양떼를 맡기신 것입니다. 고로 우리 역시 교사와 리더와 각부 임원이나 직분자들은 억지로 혹은 자신에게 이득이 될까 싶어서 봉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즐거운 뜻으로 하고 있는가? 자신에게 늘 물어보아야 합니다.

삯꾼 목자는 노략하는 이리와 같아서 겉으로는 양을 위하는 듯하나 속으로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거짓 목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 분으로부터 받은 사명감의 불꽃이 꺼져갈 때 얼마든지 삯꾼이 될 수 있음을 알기에 본문에서 여러 장로들을 예수님께 대한 참 사랑과 감사와 자원하는 맘으로 섬기고 봉사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양무리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들을 다스리려고 하기보다 모범이 되는 모습으로 그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기도의 본이 없이 전도의 본이 없이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없는가? ‘돌격 앞으로’가 아니라 ‘나를 따르라’ 가 될 때에 양들은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얻게 되는 결과가 무엇일까요? 목자장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 했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온교회의 목자장이 되시고 우리는 작은 목초지의 목동일 뿐이죠. 이 땅의 칭찬과 명예와 보수의 시드는 영광을 바라보며 아쉬워하기 보다, 운동경기의 골인점에서 승리자에게 안겨지는 ‘면류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내가 너를 안다’하시고 칭찬받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 젊은이들에게 대한 권고(5)

사도는 이제 젊은이들에게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겸손하라고 합니다. ?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며 때가 되면 그 분께서 당신의 손으로 겸손한 자들을 높이시기 때문입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는 의미는, 노예들이 주인을 시중들기 위해 앞치마를 두르거나 허리 띠를 단단히 매어 힘을 쓰기 좋은 준비 자세를 의미하고, 또한 예수께서 주와 선생이 되시지만 수건으로 앞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능하신 손을 의식하며 겸손함으로 우리 위에 세우신 교회의 지도자들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우리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해 순복과 겸손이라는 단어는 잊어버리 고 내 멋대로 행동하고 있지 않는가? 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섬기며 살아갈 때, 분명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그 분의 손으로 우리를 높여 주실 것을 소망하고 믿어야 합니다.

 

)회중에 대한 권고(6~10)

 이제 사도 베드로 일반적 성도들을 향하여 매우 중요한 신앙생활의 권면을 더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고 하십니다. 왜 입니까? 저가(예수께서) 너희를 권고하시기 때문이다. 악한자로부터 핍박이나 내면의 걱정과 고민 (6:25-34)등이 있겠지만 그런 것들을 다 예수께 맡기는 결단의 삶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내 일을 대신 염려하심을 믿고 나의 염려를 온전히 주께 맡길 수 있겠는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어느 부모님이 재정이 그런대로 풍족해서 자기 아들의 등록금을 다 대어 주실 수 있는데, ‘과연 대학교 등록을 어떻게 하지? 돈은 어떻게 벌지?’라며 고민하고 염려하는 아들이 있다면, 참으로 그 부모를 믿지 못해서 일 것입니다.

 

 우리를 권고하시는 그 하늘 아버지는 모든 것에 부요하시고 만물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염려를 다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주께 맡겨버리는 것이 중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는 우리 성도들이 근신하고 깨어 있을 것을 거듭 말합니다. 그 이유는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이라 했어요. 여러분, 길 한 복판에 사자를 만나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 사자는 관두고 큼지막한 개를 만나도 겁이 잔뜩 날 겁니다. 하물며 사자일까요? 사단은 그리도 무섭고 두려워할 만한 힘과 능력이 잇습니다. 우리 힘으론 절대 감당 못합니다. 고로 예수님의 힘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그럴려면 근신하고 깨어서 예수님을 졸졸 떠라 가야 합니다. 내 힘만 의지하면 당하고 말아요. 믿음을 굳게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저를 대적해야 합니다.

 

그리고 절망하거나 외로워 말아야 합니다. ? 세상에 있는 여러 믿음의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사자의 유혹과 궤계가 얼마나 교묘하고 강력한 지를 알아야 합니다. 배고픈 사자가 삼킬 자를 찾듯이 우리의 영혼의 빈틈을 노리고 있어요.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일심 동체가 되어 대적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믿음에는 얼마나 많은 허술한 부분이 많은가? 늘 점검하며 안일해진 우리의 믿음을 동여매고 깨어 있게 해야 합니다.

 

이제 끝부분에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그 분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잠간 고난 받는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부르셨을 뿐 아니라,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 가도록 우리를 향하여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얼마나 찬송하며 신뢰하고 있는가? 점검해 보고, 또 삼킬 자를 두루 찾는 대적 마귀의 유혹에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 ‘영원한 영광’과 ‘잠깐의 고난’사이에서 주께서 ‘친히’ 신앙의 터 위에 우리를 견고해 세워주실 것을 확신하며 사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마지막 문안인사(11~14)

 마지막 문안인사 부분에서, 사도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 하나님의 참된 은혜, 이 은혜에 굳게서라하십니다.

 

사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이토록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나그네 같은

인생길에 가시밭길 같은 고난의 길을 걸을 때, 주께서 은혜를 베푸심으로, 고난가운데서도 믿음에 굳게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격려,성령,말씀,기도,형제자매 등을 통해 임함)

그리고 사도는 이 편지가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대필되어서 씌어 졌음을 밝힙니다. 그는 ‘실라’와 동일 인물입니다.

 

즉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에 따라 안디옥에 파견되었으며, 빌립보에서 바울과 함께 옥에 갇혔다가 밤에 찬송함으로 옥문이 열려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는 또는 이렇게 베드로와 동역하였으며 본 서신의 대필자이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베드로가 신실한 형제로 호칭한 바와 같습니다.

 

이제 사도는 함께 택하심을 입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리라고 했어요.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로서 요한 또는 마가 요한으로 불리우고 마가복음의 저자이다. 이는 바울에게도 소중한 동역자였다. 이 마가를 향해 베드로는 ‘내 아들'이라고 믿음안의 친밀감을 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벨론에 있는 교회란 로마교회를 가리키는 은밀한 표현입니다. 로마는 영적으론 당시에 바벨론 같은 탐욕과 죄악의 도시였습니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표현법들과 매우 흡사한 표현입니다. 그만큼 로마제국의 핍박이 당시에 강력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결론)

 양떼와 같은 성도들과 우는 사자 같은 마귀가 공존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이 땅 위에 서의 삶이란, 목자장 되신 우리 주 예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의 친히 도우시는 은혜가 아니

라면, 우리는 사단에게 삼킴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양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사자 앞에 놓인 양떼 같은 성도들을 보며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우리 또한 베드로나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서 성도들을 돌보며 자신을 몸소 돌보고 지키기 위해, 근신하여 깨어 있는 삶을 끈임없이 살아갈 때, 시들 지 않는 영광을 면류관을 주 예수님 앞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061223 안익선 목사/ 참조: 주님의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