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전후서

베드로후서 3장 강해(재림을 예비하고 사모하라)

호걸영웅 2023. 7. 11. 08:40

베드로후서 3장 강해(재림을 예비하고 사모하라)

 

 서론)

예수의 재림은 기독교의 핵심 진리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크게 여섯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첫째는 성육신의 진리입니다. 이는 아들 하나님 예수께서 낮아지심과 겸손하심, 그리고 희생하심을 의미합니다.

2)  둘째는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화해, 이웃과의 화해입니다.

3)  셋째는 부활의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4)  넷째는 승천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만왕의 왕으로서의 선포입니다.

5)  다섯째는 오순절 성령 강림입니다. 이는 교회의 탄생으로 복음의 증인된 삶, 그리고 선교와 부흥의 역사입니다.

6)  여섯째는 재림입니다. 이는 최후의 승리로 영광스러운 환희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 날은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승리와 영광의 날입니다. 반면에 이 날은 불신자들과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복종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형벌의 날입니다(살후 1:8). 곧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이 멸하게 됩니다(고전 15:24).

이 날은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이 되셔서 영원히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이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며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 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그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본론)

1. 생각나고 기억하게 하려 함(벧후 3:1-9).

(벧후 3:1-2)=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소아시아 교인들)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 서신을 쓰는 목적은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도록 함에 있습니다. 진실한 마음(pure mind, KJV)이란 헬라어 원문에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1)겨가 섞여 있지 않을 때까지 키질한다는 의미가 있고, 2)다른 하나는 햇볕에 비춰본다는 뜻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깨진 그릇을 밀랍으로 때웠습니다. 그래서 그릇의 땜질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은 햇볕에 비춰 봄을 통해서였습니다. 바로 진실한 마음이란 죄로 깨지지 않은 마음,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을 받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당시에 진실한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와 거짓 사상이 마치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과 같이 난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를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벧전 5:8). 베드로는 이런 그들에게 순수한 마음을 일깨워 거룩한 선지자들의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사도들에게 명하신 것을 기억나게 하기 위한 편지를 썼습니다.

 

기억하는 노력은 중요합니다. 독일의 심리학자 Ebbinghaus King의 망각과 파지곡선을 보면 100이라는 것을 학습하고 하루가 지나면 50이 기억에 남고,  그냥 하루를 보내면 25가 남아 결국 한 주일만 놀아 버리면 학습한 것을 거의 잊어버리게 된다고 합니다.

반면에 어제 100이란 것을 학습하고 오늘 배운 100을 학습하면 150이 기억하게 되고, 다음 날에 다시 100을 학습하게 되면 175가 남게 됩니다. 생리학적으로도 반복 암기가 기억을 빠르게 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고 했습니다.

대개 우리는 새로운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말씀도 새롭게 배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말씀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배운 말씀을 기억하고 묵상하고 생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기억하고 묵상하게 되면 예수님의 은혜가 다시 새롭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으면 금시 은혜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먼저 이것을 알라고 경고합니다. 말세에 믿는 이들을 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경고합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조롱하여”(벧후 3:3)라고 했어요.

그들이 믿는 이들을 조롱하고 재림을 부정하는 것은 더 이상 정욕을 좇아 살 수 없기 때문입니 다. 만일 주님이 오신다고 믿을 때, 다시 말해 주님께서 오셔서 쾌락과 정욕을 좇아 사는 자들 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 그들은 두려워서 더 이상 정욕을 좇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애써 외면하며 재림을 부정하고 믿는 이들을 조롱합니다.

또 그들은 세상은 창조 이래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4)고 했죠.

사실 외적으로만 보면 만물은 처음 창조할 때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똑같이 태양은 아침에 동쪽에서 떠서 황혼이 되면 서쪽으로 지고, 밤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사계절이 이어 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첫째,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함(벧후 3:5-7)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5)라 했죠? 이들은 오늘날 무신론자들과 진화론자들의 대선배입니다.

하나님은 둘째 날에 궁창을 만드셨습니다. 셋째 날에는 땅과 바다를 나누시고 땅에는 각종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과목으로 아름답게 단장하셨습니다. 바다에는 각종 물고기를 창조하셨습니다( 1:4-13).

그런데 그들은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고의로 잊으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을 노아 시대에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홍수 심판은 모든 인류에게 향한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거나 우습게 여깁니다.

이제 하나님은 심판의 경고를 믿지 않고 경건하게 살지 않는 자들을 물이 아니라 불로 심판하신다 했습니다(벧후 3:5-7).

둘째,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무시함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했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도 없고 다 알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시간 안에 삽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우리가 느끼는 시간을 초월하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시지만 시간과 더불어 활동하십니다. (하루살이와 인간의 시간 개념은 다름)

 

그러면 언제 종말이 옵니까? 우리는 그것을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날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신비의 세계입니다. 고로 우리는 주님의 날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이단들은 재림의 일자를 못 박습니다. 성경을 사사로이 풀면 그리 됩니다. 또 주님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 하나님의 시간을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하나님의 성품을 무시함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고 합니다.

 

우리는 같은 죄인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용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자 하심과 용납하심이 무한하십니다( 2:4). 하나님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려 말하는 사람들도 종일토록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십니다( 9:21).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103:8).

 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최후 심판을 속히 이루지 않으십니까? 이는 죄인들이 한 사람이라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받도록 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악용하여 심판이 어디 있느냐, 재림이 어디 있느냐며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회개치 아니할 때에 진노의 날에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2:5).

하나님은 성적으로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에 불과 유황을 비같이 내려 그 성읍을 뒤엎어 버리셨 습니다( 19:24). 보통 비는 우산을 쓰면 피할 수 있지만 불과 유황이 섞여 퍼붓는 소나기는 그 무엇으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자 작정하시면 한 사람도 그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2.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온다(벧후 3:10-14)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 13:9)을 배경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말씀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주의 날은 도적같이 옵니다. 도둑은 예고하고 오지 않습니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납니다.

 

그 날은 진노의 큰 날로서,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고 끔찍스러운 날입니다( 6:17). 그날에 그들이 죄악 된 삶을 회개하려고 하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그 때에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집니다( 21:8).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첫째, 그날을 사모해야 함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2-14)고 했어요.

 

둘째,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라 함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가기를 힘쓰라”(벧후 3:11,14)고 했죠.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날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지 않도록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론)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바라보고 사모할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고 사모하고 열망한 것은 잠시 있다 사라질 것들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그 날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과 거하며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 하게 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재림의 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면서 살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에 썩어질 것을 사모하지 말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며 살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070423 안익선 목사/ 참조: 대학마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