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누가복음 13장 강해(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호걸영웅 2024. 1. 27. 00:47

누가복음 13장 강해(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서론)

13장은 4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9:회개에 대해, 2) 10-17: 안식일 논쟁에 대해, 3) 18-30: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4) 31-35: 예루살렘에 대한 탄식-등에 관한 기록들입니다.

 

본론)

) 1-9: 회개에 대해

13장에선 그 즈음에 악명 높은 빌라도 총독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던 갈릴리 사람들을 반역자들로 여겨 학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1). 몇몇 사람이 그 사건에 대해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고, 예수께선 희생 당한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갈릴리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랬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고 하십니다(2-3).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제물로 드리는 짐승은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이 직접 잡았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이나 초막절과 같은 때에는…… 수만 마리의 짐승을 잡아야 하는데, 제사장들이 그것을 다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제물로 드린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각 뜬 제물을 불로 태우는 일만 했습니다.
그렇게 제사장을 돕는 사람들이 사람들이 제물로 드릴 짐승을 대개는 잡고 있는데, 빌라도 총독이 반역혐의가 있는?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고, 그 피를 제물로 드릴 짐승의 피와 섞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는 성경에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누가복음 23:12에 보면 헤롯과 빌라도가 이전에는 원수였지만 당일-예수님을 죽이는 날-에는 친구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학자들은 유다 남부를 다스리던 빌라도의 이 사건 때문에 북부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안디바와 빌라도가 원수가 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빌라도 총독은 이스라엘의 남쪽인 유대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고, 헤롯(안티파스)은 이스라 엘의 북쪽인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쪽 통치자가 북쪽 사람을 죽여 그 피를 제물로 드리는 짐승의 피와 섞어버린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펼쳤고, 로마 정부는 그런 일에 대해서 무자비한 탄압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로마의 총독이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중에 당시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한 사건을 예수님께 일러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이 사건을 예수님께 고했는지 그 이유가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일차적으로는 가해자인 빌라도 총독을 비난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기 쉽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총독을 정죄하고, 그에게 분노를 쏟아 내는 것을 듣고 자신들도 예수님과 함께 빌라도 총독을 욕하고 싶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빌라도 총독의 일을 예수님께 고한 것은 빌라도 총독보다는 갈릴리 사람들에 초점을 두고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실로암에 있는 망대 탑이 무너져서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에 대해서도 언급하십니다. 그들이 다른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더 악한 죄인이어서 그런 변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4-5).

4-5절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사고도 어떤 이유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에 있었던 천재지변이나 의도하지 않았던 인재지변과 같은 재난으로 여겨집니다. 이 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사람들은 그들이 죄가 많아서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과거 한국에서도 1994년에 있었던 성수대교 붕괴나 1995년에 있었던 삼풍백화점 붕괴와 같은 사고가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 있는 실로암에서도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든 재앙이나 불행한 죽음이 죄 때문에 받는 벌이고, 모든 복은 좋은 믿음 때문에 받는 복이라고 해석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희생자들에게도 무슨 심각한 죄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생각 을 부정하십니다. 누구에게나 갑작스러운 변을 당하여 죽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변을 피할 완전한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늘 깨어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3, 5)는 말은 “죄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는 갑작스럽게 변을 당하여 죽는 것이 비극이 아니라, 회개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비극이라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은 비유 하나를 또 말씀하십니다(6-9). 포도원을 가꾸며 거기에 무화과 나 를 심었는데, 삼년이 지나도록 열매가 열리지 않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그 무화과를 모두 찍어 없애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는 한 해만 더 가꾸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없애 버리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을, 그리고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회개치 않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회개하고 열매 맺을 시간을 수없이 많이 주셨습니다. 그런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마땅합니다.

) 10-17: 안식일 논쟁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18년 동안이나 귀신들려 척추 굽는 병에 걸려 살아 온 여인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불러 손을 얹으시면서 병에서 풀려났음을 선언하십니다. 그 여인은 즉시로 그 병에서 풀려납니다(10-13). 그 광경을 보고 회당장은 분개하여 일어나서 안식일에는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 께 항의하게 됩니다.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안식일 에는 생명에 지장이 없는 한 의료 행위를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기 집에서 기르는 하찮은 가축도 안식일이라도 돌보는 것이 일반적 상례인데 어찌 가축보다 더 중하고 귀한 사람의 중병을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고통 받도록 그냥 둘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며 책망하십니다.

15,16=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하십니다. 그리고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고 했습니다.

 

) 18-30: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이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땅에 심은 겨자씨(18)와 같다 하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아무 일도 일어나는 것 같지 않지만 결국 공중의 새들이 깃들만한 나무로 자랍니다.  지금 미미해 보이는 하나님 나라는 결국 모든 사람들을 품을만한 큰 나무로 자랄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천국은 밀가루 반죽에 넣은 누룩(21)과 같습니다. 밀가루 반죽에 비해 누룩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지금 시작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는 비록 하찮아 보일지 몰라도 결국 온 세상을 변화시킬 만큼 확장될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실 때, 어떤 사람이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 까?(23)라고 여쭙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도 누가 구원을 받겠는지 그리고 구원 받을 사람은 얼마나 될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곤 했습니다. 유대인들 은 유대인들만이  구원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이 다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도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받 는 유일한 길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긴 한데 그 문은 좁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질문에 대해 바로 답하지 않으신 이유는 부질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24)라고 하십니다. 몇 사람이나 구원 받을까를 두고 따질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구원 받을만한 사람이 되도록 힘쓰라는 뜻입니다.

때가 되면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구원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9). 하지만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28). “불의를 일삼는 자들”(27)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불의를 일삼는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들의 감추어진 모습이 모두 드러날 것입니다(30).

누가복음 13장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하십니다. 아울러 좁은 문은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한 복음 10장 9) 예수님이 좁은 문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해야 구원에 이르는 까닭입니다. 예수님은 천국문이 어느 정도 좁은지 바늘귀처럼 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자는 것이 쉬워 보여도 그 수가 적은 상황을 좁은 문에 비유하셨습니다(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함).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28-29=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들(이방인들)이 동서 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이미 들어간 자들중,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믿음의 조상들입니다. 이들도 허물과 실수가 많았지만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이들 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첫째, 그들은 그들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을 확고히 믿었습니다하나님도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자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랑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으며 살았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까?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불신으로 아내를 두 번이나 누이로 속이고 첩을 얻었습니다. 이삭 은 고기를 좋아하는 식탐으로 믿음이 없는 에서를 축복하고자 하였습니다. 야곱은 교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꾀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의 허물을 감당하 여 주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나의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신 것을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둘째, 이들은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고 이삭은 흉년에도 가나안 땅에 남았습니다. 야곱은 순종하여 가나안 땅 벧엘에 돌아와 서원을 갚고 순종하여 애굽으로 갔습니다. 이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사랑과 믿음, 순종의 관계성을 맺고 순종하 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동서남북에서 온 이방인들도 같은 방식으로 천국에  들어 갑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회개하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과 예수께서 아들 하나님이요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영접과 시인함의 관계가 없으면 천국에서 쫓겨납니다. 그들은 불지 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 라. 하시더라.”고 했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기도 합니다. 에서 가 먼저 되었지만 나중 되고 야곱이 나중 되었지만 먼저 되었습니다. 에브라임이 나중 되었지만 먼저 되었고 므낫세가 먼저 되었지만 나중 되었습니다.

 

이들이 나중 되고 먼저 된 것은 믿음이 있고 없음에 달려 있었습니다. 에서가 버림 받은 것은 영적 가치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 다. 불신자와 그는 결혼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믿 음의 결혼을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먼저 되게 하시고 불신으로 사는 자는 나중되 게 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 31-35: 예루살렘에 대한 탄식

그 때 예수님에게 우호적인 바리새파 사람 몇이 와서 헤롯의 살해 의도를 전하면서 피신하 시라고 권고합니다(31). 그러자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32)라고 부르면서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당신의 사명을 다할 것이라고 하십니다(32-33). 예언자로서 예루살렘에서 죽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 영예-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운명을 내다보시면서 탄식하십니다(34-35).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선택한 도시입니다. 그래서 “우주의 배꼽 ”이라 는 별명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종교를 권력 삼아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이 항상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박해했고 때로는 살해했습니다. 이제 그런 죄들이 예수님의 죽음에서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겠지만, 그토록 죄를 쌓아 온 예루살렘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35) 할 그 때까지 즉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침략을 당하고 훼파되며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 말씀은 지금까지 그대로 이루어졌고 결국은 말씀대로 마지막 때에 겨우 회복이 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결론)

1.   늘 나의 의를 자랑 말고 예수님의 의를 자랑합시다. 남을 지적하는데 힘쓰지 말고 나의 흠과 티를 직시하며 삽시다.

2.   하나님의 나라, 곧 복음은 누룩이나 겨자씨와 같으니, 실망 말고 계속 씨를 뿌리며 삽시다. 때가 되면 싹이 나게 됩니다.

3.   형식적 율법보다 생명 존중과 자비가 더 중요합니다. 처벌보다 사랑과 용서가 먼저입니다. 좋은 법은 예외 조항이 꼭 있습니다.

 

 

122623 안익선 목사/ 참조: God made & 오요한 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