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누가복음 15장 강해(잃어버린 3가지를 되찾음의 의미)

호걸영웅 2024. 2. 23. 10:53

누가복음 15장 강해(잃어버린 3가지를 되찾음의 의미)

찬송가 277장 ‘양 떼를 떠나서’

서론)
15장엔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 3가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양, 곧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옴에 대한 의미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다시 되찾음의 의미,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 곧 탕자의 비유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각 단락마다 소제목이 있습니다. 1)1-7절은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비유’이고, 2)8-10절은 ‘잃은 드라크마(은전)를 찾은 여인 비유’, 그리고 3)11-32절은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입니다. 그런데 왜 잃어버리게 되었는지와 그것을 되찾는 방법이 약간씩 다릅니다. ‘잃은 양’은 양이 자기 발로 양 떼와 우리를 빠져나갔기 때문에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고, 목자가 양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곳까지 가서 거기서 우리까지 데리고 옵니다. ‘잃은 드라크마’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잃어버린 상태가 되게 한 것인지 아닌지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여인이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장소를 인지했기 때문에 되찾게 되었습니다. ‘잃은 아들 ’은 자신이 잃은 상태가 된 것은 자신이 스스로 아버지의 집을 떠났기 때문이고, 또 자기 발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되찾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잃은 양을 되찾는 목자 비유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비유지만,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와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비유는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하나님은 사랑 많은 아버지십니다. 우리 인생들은 본래 탕자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변함없이 탕자가 돌아오길 기다리셨고, 극진하고 자비롭고 항상 용서를 원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면 곧 구원의 길에 접어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새롭게 변화되고 참 행복과 안식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본론)

)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비유(1-7)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개의 비유 중, 먼저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비유 ’입니다.
(1-2)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언제나 의인을 위하시는 분이었고, 죄인을 위하시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죄인들은 언제나 형벌의 대상이었지, 구원의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삶을 의롭게 보이기 위해서 율법 지키는 것을 철저하게 준수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듯이, 내가 의인을 부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서 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그들은 결코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수용하게 되면, 자신들의 신앙관과 가치관이 모두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맞아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예수님의 행동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당시 사람들에게 ‘세리 ’는 백성들로부터 강압적이면서도 터무니없는 세금으로 자신의 배를 불릴 뿐만 아니라, 걷은 세금을 로마 정부에 바쳤기 때문에, ‘면허증을 가진 강도’라고 불리기도 하고, ‘숲속에는 이리가 있고, 거리에는 세리가 있다 ’라고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당황케 만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생각을 교정시켜 주시기 위해서 비유들을 들려주셨습니다.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양은 지독한 근시(近視)이기 때문에 길을 찾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들은 서로 무리를 지어 다니는데, 무리에게서 떨어진다는 의미는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또 양은 스스로 먹이를 구할 능력도 부족합니다. 양의 시력으로 분명하게 물체를 구별할 수 있는 거리는 불과 2-3m 정도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양은 자기 생명을 스스로 보호할 능력도 없습니다. 숫양의 머리에는 굽은 뿔이 있기는 하지만 뒤로 감겨져 있어서 자신을 보호하는 데 별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은 고집은 아주 세죠. 바로 그런 양이 길을 잃었을 때 ……목자가 죽을 뻔 했던 양을 찾고서 취한 행동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5)
또 찾아낸 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목자는 잃어버렸던 양을 찾은 후에 즐거워하며 그 양을 어깨에 메었습니다. 길을 잃은 양에게 목자의 어깨 위보다 더 안전한 장소는 없을 것입니다. 양은 결국 불안과 두려움, 피곤함에서 안식과 안도, 편안함을 회복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양을 찾은 목자는 돌아와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목자의 기쁨이 매우 사랑으로 양들을 돌보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 비유(8-10)
2
번째 단락은 드라크마(은전)를 찾은 여인 비유입니다.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 당시에(지금도 그렇지만) 팔레스타인은 낮에는 기온이 아주 높지만, 밤에는 기온이 뚝뚝 떨어지는 일교차가 아주 큰 지역이라서 가옥은 더위와 추위를 모두 잘 막아주는 형태여야 했습니다. 고로 창문은 매우 작은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대낮이라고 할지라도 집 안은 아주 어두웠고, 자세히 무엇인가를 하려면 반드시 불을 켜야 했습니다.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이 여인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서 잔치를 열 정도로 기뻐했다고 증거합니다. ‘드라크마’는 헬라식 화폐 표현인데, 로마식으로 바꾸면 ‘데나리온’에 해당하며, ‘성인 노동자 하루 치 일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기쁨은 잃었던 드라크마의 액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서민 남자들이 결혼할 때에, 아내가 될 사람에게 결혼 선물로 드라크마 10개를 주곤 했습니다. 그러면 여인은 그것을 받아서 구멍을 뚫어 목걸이로 만들어 달고 다니거나, 머리띠로 만들어 다녔습니다. 여인들은 이 선물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며, 요즘 결혼 보석 반지처럼 세심하게 간직했습니다. 만약 그것을 잃어버린다면 남편은 자기 아내가 자신에 대한 사랑이 식었거나 남편의 사랑을 무시했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한 일입니다. 고로 잃었다가 되찾은 드라크마는 그녀에게 엄청나게 큰 기쁨을 주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비유의 결론을 동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고 말이죠.

)아온 탕자의 비유(15:11-28)

3단락인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관계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구속사적 비유입니다. 또한 긴 방황을 통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참 위치를 깨닫게 되는 죄인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기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 중에 살아가는 죄인의 방식과 그들의 결국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고민들도 엿볼 수 있으며, 상대적으로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새롭게 해야 하는가를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

1)
집을 떠나는 둘째 아들
이 비유의 배경을 우선 살펴보면 아버지와 두 아들, 그리고 많은 품꾼과 큰 집 등이 나타나 있습니다.
집을 나가는 둘째 아들에게는 분명히 자기 나름의 색다른 삶의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을 나서기전 어차피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이 있었고, 또 율법에 의해서라도 재산의 삼분의 일 정도는 받을 수 있었습니다. (21:17) 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욕망은 아버지의 재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해소할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자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에 있을 때 세상을 바로 보는 믿음의 눈을 가지지 못한 이 둘째 아들은 철저한 실패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13)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흉년이 들게 되자, 그는 돼지를 치는 비천한 직업을 갖게 됩니다. (15) 돼지는 유대인들이 극히 부정하다고 여기는 동물 중의 하나였습니다. 올바른 물질관, 세계관, 인생관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천한 삶만이 주어진다는 교훈입니다.

2)
돌아온 아들
17
= 둘째 아들의 회개는 과거의 풍족함으로 인한 상대적 빈곤에서 시작된 것이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아버지의 집과 세상과의 비교에서 느끼는 철저한 회개였습니다.

18절 서두에 나오는 '내가 일어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아나스타스'로서 '죽은 자가 살아났다','깨어났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돌아가는 실제적인 행동이 20절에 나옵니다.

 

3)탕자의 아버지
15:20-24=본문은 탕자의 비유 중 그 중간 부분으로 탕자를 맞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부분입니다.
 *
기다리시는 아버지;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에게 상속될 분깃을 미리 받아 다시 돌아올 기약없이 떠나갔지만 언젠가는 그 아들이 돌이켜 아비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들이 아비의 품을 떠날 때는 아직도 그는 철이없고 연약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고로 아버지는 그가 뉘우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 그리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의 품을 떠난 후 지금까지 천년이 하루같이 우리가 돌아오기 만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
자비하신 아버지; 보통 세상의 아버지들 같으면 본문과 같은 탕자를 아무런 책망이나 나무람 없이 맞는다는 것은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 20절 하반절에 '아버지가…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맞추었다'는 것을 볼 때 이 탕자의 아버지가 얼마나 사랑과 자비가 충만한 사람인가를 말씀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먼저 과거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2)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3)또한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지금 그는 헌 누더기를 걸치고 굶주려 돌아왔으며, 재산도 다 탕진해 버리고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 못한 맨발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고 하면서 이제는 염치도 없어서 아들의 대우도 받지 않겠다는 것이요 종이나 머슴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생각이요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체면없고 자격없는 탕자 같은 우리조차,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세상에서 돌이킨 그 믿음과 용기를 보실 때, 좋은 옷을 입히시고 신발을 신기시고 금반지를 다시 끼워 주시는가 하면,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푸셔서 즐거움을 삼으시며, 또 너무나도 크고 놀라운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셨습니다.

4)맏아들의 편협함(15:25-32)
본문은 주님의 '탕자의 비유' 중 큰 아들에 관한 비유의 일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짧은 비유 속에서 편협하고 율법주의적이기만 한 종교인들,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한계성과 그 폐단을 볼 수 있습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집에'(25)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작은 아들과는 달리 근면한 생활을 하는 사람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집을 떠난 동생의 형편에 관한 염려도, 또 부친의 애닯은 슬픔과 걱정에도 무관심했으며, 동생이 떠난 후 '여러 해 …어김없이'(29) 없이 밭과 집 사이만을 오갔던 것(율법주의나 외형주의에 습관화 됨)입니다.

 

 그가 남들 보기에는 성실하고 열심히 생활하는 듯하지만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이웃에 대한 자비와 긍휼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자랑과 타인의 결점을 찾아내는 일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6:6-10.39-41) 그는 동생의 회심도, 아버지의 기쁨도 수용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가 나와서 권'(28)하는데도 이성을 찾지 못하고 분노하며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형의 가장 큰 문제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도 왜곡되고 부족했다는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

우리는 되찾은 것들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을 잘 이해하고 깨달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실만큼 사랑하신 그 사랑의 마음이 눅 15장의 주제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영혼들을 되찾는 일에 열심히 동참하기 힘쓰는 자녀들이 됩시다.

 

011124 안익선 목사/참조:정한조 & 엔젤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