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아가서 1장 강해(첫사랑의 고백)

호걸영웅 2024. 5. 4. 23:11

아가서 1장 강해(첫사랑의 고백)


서론)

아가서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아가서는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 간의 사랑을 통해(3:11; 6:13) 이상적 남녀간과 부부의 사랑을 증거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 자기(당신의) 백성인  이스라 엘의 사랑의 관계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피 흘려 사신 교회와의 사랑의 관계를 상징적으 로 묘사합니다. 성경은 종종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하고 또 이스라엘의 배교(背敎)를 영적 행음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3:6-8, 14; 1:2; 3:19 ). 바울 서신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 교회의 관계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비유하였습니다( 5:22-33).

 

본론)

[1] 솔로몬의 아가라 =아가서의 인간 저자는 솔로몬 왕이죠. 열왕기상 4:32는 솔로몬 이 잠언을 3,000개나 말했고 노래를 1,005개나 지었다고 증거해 줍니다. 아가서도 그 중의 일부입니다. 아가 서를 성경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은 처음부터 정통 유대교의 견해이 며 또 초대교회의 견해이기도 합니다.

[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2
절을 직역하면, “그가 그의 입의 입맞춤들로 내게 입맞추게 하라. 이는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다.”입니다.  히브리 말에는 남성, 여성 같은
을 구분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가서에서는 단어의 형태, 동사의 어미 등을 고려하면, 그것이 누구의 말인지를 알 수 있어요.

 

2절은 신부의 고백이며 신부는 신랑 ()의 사랑을 ‘포도주보다 나은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포도주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음료지요.  다윗은 고백하기를,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4:7).


[3
]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 하는구나=

 

 ‘네 아름다운 기름 ’이란 주님의 머리와 몸에 발라진 마리아의 향유를 연상시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2:3에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는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주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시며 그의 거룩함과 사랑은 아름다운 향기와 같습니다. 그 이름의 향기(명성) 때문에?라도 처녀들은 그를 사랑합니다. 본문에서‘처녀들’은 성도들을 은유할 수 있습니다.

 

[4] 왕이 (왕인 그대가)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술라미 여인과 시녀들?)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난다’는 말은 포도주 보다 나은 사랑’을 가리켜요. ‘우리라는 말은 ‘나’와 친구나 가족을 의미하는 듯해요.

 

 ‘왕이 나를 침실로 이끄신다’는 표현은 이미 두 남녀의 사랑이 매우 친밀한 관계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제함도 친밀한 교제여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것은 영적 친밀을 말합니다.

 

성도들(혹은 교회)도 하나님과 그의 사랑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를 칭송해야 합니다. 시편 73:25-26,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 라.”고 했습니다.


[5
]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이라는 원어는 ‘예루살렘의 딸들’이죠. ‘예루살렘의 딸들’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내가 비록 검다’는 말은 세상의 고난에 방치 되었던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핍박 등을 수임없이 받기 마련입니다. 그런 교회의 외적 모습은 거무스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외적 모습은 마치 게달의 장막과 같기도 합니다. 게달은 이스마엘의 후손 중 게달의 자손으로서( 25:13) 아랍 유목민이며, 그들은 검고 투박한 천막에서 생활하는 자들입니다.

 

게달의 장막은 뜨거운 햇볕과 폭우와 풍진으로 인해 거무스름하고 투박해진 모습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내면적으로는 솔로몬의 휘장과 같습니다. 솔로몬의 휘장은 의심할 것 없이 가장 고급스럽고 아름답습니다.

 

[6]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내가 일광에 쬐인다’는 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또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내 어미의 아들들’은 촌수로는 형제이지만, 실상은 거짓 형제들, 위선적 교인들을 가리키며, 그들은 옛날부터 오히려 참 성도들을 괴롭혀왔죠.

 

구약시대에도, 예수님과 사도들 당시에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은 실상 마귀의 자식이 요( 23:33; 8:44) 사탄의 사자요(고후 11:15)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3:18). 그들은 거짓 목사들이요 거짓 사도들입니다. 그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거짓된 방향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신부는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라고 말합니다. ‘나의 포도원’이라는 원어는 ‘내 자신의 포도원 ’이죠. 그것은 참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성도가 참 교회의 임무를 바르게 수행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참 교회의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파함으로 영혼들을 구원하고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이 영적으로 자라 온전케 되게 하는 것이죠. 교회 안에 있는 거짓된 종들과 교인들은 교회의 참 임무를 버리고 교회가 다른 일들, 곧 헛된 세상 일들에 한 눈을 팔게 합니다. 교회는 이것을 반성하고 본래의 모습과 위치로 돌아와야 합니다.


[7
]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되랴.=
성도는 고난과 핍박 중에서라도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함에 변함이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처녀는 남자에게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고 말합니다. 남자는 양떼를 치는 목자로 묘사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의 목자되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은 정오, 곧 가장 더운 시간, 즉 고난의 시간에 쉴 수 있는 그늘이나 피난처를 가리킵니다. 성도는 환난 중에 주께로 피합니다.

주는 그의 피난처요 쉴 만한 곳이 되십니다.

 

후반절을 다시 번역하면, “이는 내가 네 친구들의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될까 함이라.”입니다. 보통 사람들인 목자(성도)들 사이에 우리가 살아 가고 있으니 신랑되신 주 예수께서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우리 마음 깊은 것도 다 헤아리십니다.

 

[8]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주께서는 우리를 ‘여인 중에 어여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보기에 거무스름한, 별로 예쁘지 않은 자들이지만, 주께서는 우리를 예쁜 자로 여기십니다. 그것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 죄를 씻으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셨고 성령을 부어 주셨기 때문이죠. 주께서는 우리가 그의 계신 곳을 알지 못하겠다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첫째는 양떼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고, 둘째는 목자들의 장막 곁(가까운 곳)에서 우리의 염소 새끼를 먹이는 것입니다.
양떼의 발자취를 따르라는 것은 앞서간 진실한 성도들의 발자취를 주목하고 배우며 따르라는 뜻이죠. 성경의 경건한 인물들뿐 아니라, 역사상 경건한 인물들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2)
또 본문은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우리의 염소 새끼를 먹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목자들’은 신실하고 충성된 목자들을 가리킵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외에도 역사상 신실한 목자나 선생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했고 바른 삶을 본보였어요 (고전 3:10-12). 우리는 그런 교회에 속하여 주를 섬겨야 합니다.

 

 [9]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신랑은 신부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교하였습니다. ‘준마(駿馬)’라는 원어는 ‘나의 암말’이라는 뜻이예요. 말은 짐승 중에 아름답기도 하지만, 사람이 쓰기에 매우 유익하죠. 말은 힘과 용기가 있으며 잘 길들여진 말은 전쟁에 필수적 장비입니다.
주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그러한 말()에 비유하십니다.

[10]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또 신랑은 신부의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그의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처녀의 뺨과 목은 아름다웠고 거기에 장식물과 구슬 꿰미가 있을 때 더욱 예뻐보였습니다. 그런 아름다움은 성도들의 아름다운 덕과 선한 행실을 가리킵니다(벧전 3:4; 딤전 2:10).

[11]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
‘우리가’라는 표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교회를 위해 은 단추로 장식된 금사슬을 만드시겠다는 것은 교회를 위해 아름다운 복을 예비하시고 허락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죄씻음과 중생(重生)과 의롭다 하심과 양자됨과 성령을 주셨을 뿐 아니라, 또한 훌륭한 목자들과 성도들, 의로운 법들과 거룩한 규례들을 주셨고 또 계속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진실히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에 게 더욱 아름다운 은혜로 채우실 것입니다.


[12-14
]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12절의 ‘나드 기름’은 매우 값비싼 향유로서 신약성경에도 나옵니다. 마가복음 14: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라 했죠? 나드는 마타리과의 다년생초로서 히말리야 3000미터 고지에서 자생한 다고 합니다.

몰약은 맛은 쓰지만, 냄새는 좋아서 최고의 향유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된다고 합니다. 몰야나무에서 채취하는 수지의 일종인데 송진이 굳은 듯한 형태이며 희거나 누렇거나 노란빛을 띱니다.

 

14절의 고벨화(코페르 ר)는 엘 헨나라는 나무로서 향기 있고 흰 꽃들이 포도송이처럼 자라는 떨기나무입니다.

 

본문은 신랑이 신부에게 얼마나 향기로운 존재인가를 세 번이나 말합니다. 상에 앉은 왕에게 신부의 나드 향유가 부어진다고 표현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아름답고 향기로운 존재인지! 그의 아름다우심과 향기는 그의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선하신 인격과 그의 십자가에서 나타내신 사랑의 행실을 통해 확실하게 증거되었죠.

 

[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신랑이 신부에게 하는 이 말은 주께서 교회를 어떻게 예쁘게 보시는지 말해줍니다.
주님께서는 또 “네 눈이 비둘기 같다”고 칭찬하십니다. 비둘기의 눈은 매나 독수리의 눈과 다릅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온유하고 순결한 눈을 가리킵니다. 눈은 단순히 밖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아니라 또한 내면적 성향을 가리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여쁘게 여기심에 대해 늘 감사해야 합니다.

 

[16-17]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신부는 신랑에게 “당신이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대답합니다. ‘화창하다’는 ‘사랑 스럽다, 기쁘다’라는 뜻입니다. 주께서 교회를 어여쁘게 여기시지만, 실상 아름다우신 자는 우리가 아니고 주님(혹은 하나님) 자신이십 니다. 신약적으로는 주 예수께서는 본래, 본질적으로, 완전히 아름다우시며 또 그는 사랑스러우시고 성도들에게 크나큰 기쁨을 주십니다.

 

신부는 또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라고 말합니다.

 

침상은 교제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성도들의 교제, 즉 말씀과 기도의 교제를 가리킵니다. 그것이 푸르다는 말은 신선하고 생명력이 있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우리에게 힘과 기쁨을 주고 생명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집은 교회를 가리킬 것인데, 그것의 들보가 백향목이며 석가래가 잣나무라고 말한 것은 그 집이 튼튼하며 향기로움을 나타냅니다.

 

결론)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사랑스러우심을 깨닫고 최선을 다하여 그를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아가서의 말씀과 같이 그에게 사랑스러운 고백할 수 있도록 그를 사랑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귀히 여기며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고 그에게 기도함으로써 새로운 힘과 기쁨을 얻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032124 안익선 목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