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6장 강해(사래의 여종 하갈과 그 후손에 대한 기록)
서론)
창세기 16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후손에 대한 약속을 15장에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람과 사래가 어떻게 그 약속에 대해 반응하였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론)
가)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는 아브람과 사래(1-6절)
(1절)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했어요.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늙어져 출산하지 못하는 형편에서 사래의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후처로 삼게 됩니다. 하갈은 아브람이 애굽에 있을 때 얻은 여종이었다 했습니다.
(2-3절)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합니다.
아브람이 아내 사래와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브람은 우르 땅을 떠날 때부터 하나님께 자손에 대한 약속을 이미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녀가 생길 기미는 10년 동안 전혀 보이지 않은 까닭에 인간적 방법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래는 아브람에게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사래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당시 풍습대로 자신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 아브람의 자식을 낳고자 합니다. 사래는 후사가 아브람의 씨를 통해 나와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17장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사래의 몸에서 아브람의 후사가 나온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했다고 보여지기도 합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는 표현은 단순히 들은 것이 아니라, 귀 기울여 듣고 합당하다고 믿어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결국 아브람은 사래의 제안을 받아들여 하갈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당장에 우리가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인간적인 차선의 방법들을 동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훈련, 인내하는 훈련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4-6)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녀)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여 임신하게 되자,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으로 결정해서 움직이는 것은 처음에는 잘 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중에는 분명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줍니다.
하갈은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자, 여주인인 사래를 무시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사래가 자식이 없는 것을 수치로 여겨…… 사래는 그 수치를 피하고자 여종 하갈을 이용했지만, 오히려 그 여종에게 멸시를 당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할 때 안 좋은 결과가 돌아 올 수 밖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당황하고 분노한 사래는 아브람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자신이 당하는 모욕에 대한 책임을 아브람에게 돌립니다. 사래는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면서, 재판관이신 여호와께 호소합니다. 물론 자신의 주제를 망각하고 주인을 멸시한 하갈도 큰 잘못이 있지만, 사래 스스로도 자신의 인간적인 방법이 잘못된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을 아직까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사래가 원하는 대로 하갈에게 하라고 말하자 사래는 하갈을 학대했고 견디기 힘들었던 하갈은 도망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분명히 행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약속이 분명하다면 때와 일하심을 기다릴 수 있는 인내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여호와의 사자와 도망친 하갈의 만남(7-9절)
(7-9)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녀)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하갈이 가나안 땅에서 자신의 고향 애굽으로 도망치는 남서쪽 광야 길이 ‘술(수르) 광야’에 있었고, 그 도중에 샘물이 있었는데, 거기에 하갈이 다다랐을 때, 지친 그녀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그녀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사자는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먼저 묻습니다. 사자는 하갈을 ‘사래의 여종’이라고 부르시며 지금 그녀의 신분적 소속이나 위치에 대해 다시금 확인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하갈은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치고 있습니다.”라고 앞의 질문에만 대답합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지시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서 이전처럼 여주인에게 도전하지 말고 스스로 복종해야 함을 일깨워 주십니다.
다)하갈의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10-16절)
(10-14)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녀)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고 했습니다.
사래에게 다시 돌아가 복종하라는 명령에 이어 하갈을 향한 약속도 주십니다.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갈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으라고 지시합니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고통을 들으셨다’입니다.
이어서 이스마엘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는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들나귀 같이 자유롭게 살아갈 것이며, 많은 이웃들과 적대적인 관계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형제와 대항하긴 하지만 멸망하진 않는다 하십니다. 사실 썩 반가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절망적 상황도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사실 사래의 학대를 피해 광야까지 도망 나온 하갈에겐 사래에게 학대를 받을 때,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배속에 있는 새로운 생명까지도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여호와의 사자로부터 너의 씨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번성하게 된다는 말씀과 자신의 아들 이스마엘에 대한 예언은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당장에 자신과 자신의 아들 이스마엘은 죽지 않고 무사히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예언은 아라비아, 시리아, 이집트, 북 아프리카 사막 등을 방랑하면서 이민족을 침공, 약탈하기 일수인 베두인족과 A.D.7-15C 말까지 시리아, 이라크, 북아프리카, 대서양연안까지 진출, 무력으로 사라센(Saracen) 제국을 건설했던 호전적(好戰的)인 아랍 여러 족속들에 의해 역사적으로 성취었습니다. (약 70점 짜리 만족도가 있는 약속이라 할까요? 결국 이 예언은 2024년도 9월 현재도 ….이스라엘과 벌인 여러 중동 전쟁과 레바논의 헤즈볼라 및 가자지구 전쟁 등을 통해서도 변함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
물론 사래의 입장에서는 다 만족할만한 예언의 약속은 아니지만, 70점 정도의 만족도를 얻을 수 있는 약속도 생사조차 불투명했던 당시의 그녀에겐 감지덕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엘 로이)이라고 부르며,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고 부릅니다. 이는‘살아 계셔서 나를 살피시는 분의 우물’이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시 사회적으로 볼 땐, 비천한 여종이었던 하갈과 그 임신 중인 아이 이스마엘까지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15-16)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하갈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브람의 아들’을 낳았고, 아브람은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의미)이라고 불렀습니다.
결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 대해, 인생들에 대해, 세상 만물과 역사에 대해 하신 말씀들을 늘 의심치 말고 들으며 신뢰하여야 합니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내 방식대로 일을 처리해서는 아니됩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만의 처리하시는 방법과 때가 있음을 늘 믿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또 비천하게 여겨졌던 여종 하갈의 고통조차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의 신음 소리와 고통에도 귀 기울이고 들으시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실 것을 신뢰하면서, 늘 기도에 힘쓰는 우리 믿음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092624 안익선 목사/ 참조:오웅식 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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